기쁜소식선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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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소식선교회의 이단 시비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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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론은 2003년도에 한국 교회 연합체들 중 하나인 '예장연(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에서 처음으로 기쁜소식선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1년 동안 다방면으로 검증하면서 이단 시비에 대한 반론 자료를 요구했을 때 작성된 내용이다. 예장연은 모든 검토를 끝낸 후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렸다.

기쁜소식선교회는 성경 중심의 신앙과 참된 회개를 강조하는 교회로 이단이라 할 수 없다.”
        (2004. 6. 4 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발간 '정통과 이단' 248p)

기쁜소식선교회를 현대 복음주의 교회들이 이단시 하는 3가지 대표 이유 * 인용 : ‘이단 사이비 종합 자료 2004’(발행처 한국교회문화사) 16p~17p

 

1.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한다.

- 권 씨가 ‘죄사함을 깨닫고’ 유 씨가 ‘복음을 깨닫고’ 이 씨가 ‘중생을 경험하고’ 박 씨가 ‘거듭난 체험’을 했다는 것은 같은 뜻으로서 ‘깨닫고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면서 그 구원받은 시각(영적생일)을 알아야 한다고 하며, 육적생일을 기억하는 것과 같이 영적생일을 기억해야 구원받은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육적생일은 부모나 타인에 의해서 알 수밖에 없는 것인데 영적생일도 타인이 가르쳐 주어야 알 수 있다는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 깨달음은 믿음에서 오는 것으로 깨달음 자체가 믿음의 전부가 될 수 없는데, 저들은 구원에 대한 피동적인 깨달음 자체가 구원을 얻게 하는 것처럼 주장하여 영지주의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2.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한다.

- 구원받은 자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회개란 ‘돌이킨다’는 말로써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한번 돌이켰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필요가 없고 이미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사했으므로 회개를 계속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이므로 구원받지 못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기도문도 외우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구원을 위한 단회적 회개(히 6:1 이하)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인 회개를 구별하지 못하며(시 51편; 삼하 24:10; 마 6:12; 요일 1:8~9), 죄에 대한 참된 통회와 회개는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3.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지옥으로 간다고 한다.

- 구원받은 후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과 같은 의미로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라고 하면 천국은 의인만 가는 곳이요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니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저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해야만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고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성화되어 가는 것이며, 참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다. 바울도 죄에 대하여는 과거 시제로 고백하고(딤전 1:13) 죄인의 괴수됨에 대하여는 현재 시제로 고백했던 점은(딤전 1:15) 구원파의 주장과 전혀 다른 것이다.

 

 

위의 이단 시비에 대한 기쁜소식선교회의 반론

 

1-1.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다만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깨달음을 통해 얻어진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시 3: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행 15:11)

 

위의 말씀들처럼, 구원은 피구원자인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다. 즉 구원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신 사실을 믿음으로써 받는다. 그 믿음이 오기 위해서는 구원의 복음을 정확하게 알고 마음에 참된 깨달음이 와야 한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겨 왔지만, 대부분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했다. 당연한 결과로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경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이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깨닫도록 해주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사 43:10)

“내가 너를 …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마 15: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 15:16)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성경은 위의 말씀들 외에도 참된 깨달음의 중요성을 수없이 역설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주 무리들에게 들은 말씀을 깨달으라고 하셨고, 당신이 전한 말씀을 깨닫고 있는지를 확인하셨으며,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물론 이 깨달음은 우리의 지혜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할 때 아래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이 나타나기를 사모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이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은 참된 깨달음은 죄 사함의 구원을 받는 데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위의 말씀에서도 육에 속한 사람,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진리나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깨달음을 통해 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을 때 믿음의 대상을 보지 않고 믿을 수는 있지만, 믿음의 대상을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 막연하고 애매한 생각을 믿고 따르는 것은 미신이지 참된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와서 그 말씀을 바르게 믿음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깨달음 없이 막연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본 선교회에서는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을 정확히 깨달아 바르게 믿도록 인도해 주고 있다. 실제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채 거듭나지 못한 종교적인 삶 속에 머물러 있다가 본 선교회를 통해 분명한 말씀을 듣고 깨달아 죄 사함을 받은 후 밝고 새롭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 참 많다. 혹자는 본 선교회가 깨달음만을 강조한다고 비방하기도 하는데, 이는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본 선교회의 입장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1-2. 반드시 거듭난 체험과 날이 있어야 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고 하셨다. 거듭난다는 것은 영적 출생을 말하는 것으로 육적 출생처럼 반드시 태어난 날이 있다. 생일이 여러 날에 걸쳐 있지 않듯이, 거듭나는 것도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경험이 아니라는 데 이의가 없다면, 거듭난 날이 분명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 어떻게 거듭났는지에 대한 분명한 간증이 있다.

혹자는 “갓난아이가 어떻게 자신의 태어난 날을 아느냐? 부모가 생일을 이야기해 주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고 하면서 스스로는 거듭난 날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육체적 출생과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重生)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육체적으로 출생하는 것은 이성(理性)이나 지적 능력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지지만,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는 것은“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요일 5::19~20) 등의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지각을 주셔서 알게 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데 어찌 모르는 것이 정상인가?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서도 이 복음이 마음에 임할 때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다고 했기에, 본인이 모르는 상태에서 거듭난다는 주장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크고 놀라운 일임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찌 자기 영혼이 죄악과 멸망에서 구원을 받아 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날을 잊고 산단 말인가? 간음 중에 잡힌 여자가 주님을 만나 죄 사함을 받은 날, 십자가의 강도가 낙원의 약속을 받았던 그 날보다 그들의 생애 속에서 복된 날이 있었겠는가?

혹 어떤 사람들은 요한복음 3장의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요 3:8)는 말씀을 인용해서 거듭나는 것은 본인이 모르는 거라고 주장한다. 성경을 조금만 읽어 보면 그것은 자신들이 거듭나지 못한 것과 성경에 대한 무지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거듭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기이했고,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하며 의아해 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의 종교인으로서 예수님이 행하는 표적도 보고 믿었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도 아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은 그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요 3:8)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오해하여 정반대로 ‘사람은 거듭났는지 안 났는지를 알 수 없다’는 식으로 왜곡하고 있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것이 어떤 영적 경험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니고데모에게 “네가 … 알지 못하나니”라고 하셨지, “성령으로 난 사람이 모른다.”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0절에서 주님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증거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고, 또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209장)

 

위의 찬송가사도 그 주제가 거듭남이라고 찬송가에 적혀 있고,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나오는 구원의 날을 근거로 지은 가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사도행전 2장 41절에서도 초대교회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 하루에 3,000명이 제자가 되고 안 되는 것을 정확하게 분별해 내지 않았는가? 빌립보서 4장 3절을 보면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는 말씀도 있다. 즉,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는지도 정확하게 밝히고 있는데, 어찌 자기 영혼이 거듭났는지 안 났는지, 자기가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본 선교회가 거듭난 일시를 정확히 알아야 거듭나는 것으로 인정한다고 왜곡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본 선교회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거듭나는 은혜를 입어야 하며, 분명하게 거듭난 사실이 있어야 한다.”는 성경의 진리를 강조하는 것이지, 그 날과 시간 자체를 기억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다만 기독교인으로서 거듭난 체험이 없거나, 아니면 엉뚱한 체험을 거듭난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부분은 성경적으로 반드시 바로잡혀야 한다.

 

 

2. 진정한 회개와 자백이 필요하나, 회개 기도로 속죄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 선교회에서는 회개를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로 여기지만, 비성경적이고 변질된 회개 기도는 개혁되어야 됨을 강조한다. 특히, 본 선교회가 기도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무근한 것으로, 본 선교회에 속한 모든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가 공식 예배 순서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도 개인의 기도 생활도 강조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성경적인 회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성경에서 회개는 구원의 필수적인 과정이고 조건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 회개는 한자어로는 ‘悔改’로 ‘뉘우치고 고친다.’는 의미며, 헬라원어로는 ‘메타노이아’로 ‘가던 길에서 돌이키다. 마음을 고치다.’이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정확히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아담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부분적인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 본질, 소속, 길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회개에는 먼저 그 자각이 와야 한다. 그 후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데, 문제는 몇몇 가지 잘못된 행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회개인 줄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17~19)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진정한 회개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자기 생각과 욕망을 따라 먼 나라로 갔다. 그 결과로 허비와 궁핍, 수고와 고통, 실패와 죽음을 맞게 되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탕자가 아버지를 떠날 때 이미 죽었는데, 둘째 아들은 주려 죽는 형편이 왔을 때 비로소 그 마음에 죽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 둘째 아들은 어떻게 돌이켰는가? 허랑방탕한 삶에서 성실한 삶으로 돌이켰는가? 아니다. 아버지를 떠나 자기를 믿고 산 삶의 결국이 멸망임을 깨닫고, 자기 자신에게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왔다. 그 돌이킴이 참된 회개이며, 구원과 거듭남의 필수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가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의 변화 없이 부분적인 행위를 고치고 다듬는 데에만 애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나 사망과 저주 아래 있는 자기 영혼의 상태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지만 회개기도를 했으니까 용서해 주시겠지’하는 생각 뒤에 숨어 회개 기도가 오히려 범죄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방패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 중심으로 돌이키고 죄에서 벗어나는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양심의 정죄와 가책에 얽매여 살고 있다. 사실 범죄나 허물은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데서 나타나는 결과요, 열매이다. 그렇기에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 마음이 우리를 주장할 때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회개에 있어 더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죄를 지은 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함으로 죄 사함을 받는 방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즉, 죄 용서를 구하는 회개기도를 함으로써 죄가 씻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참 많은 교인들이 죄를 짓고 나면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회개기도를 하고 있고, 그러한 기도를 하지 않으면 이단시한다.

 

“…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히 9:12)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히 9:7)

 

위의 말씀들처럼, 우리의 모든 죄는 무슨 죄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믿는 믿음으로만 씻어지는 것이 진리인데, 행위적인 차원의 회개기도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을 대신하는 하나의 속죄 방법으로 대체되어 결국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믿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죄를 지으면 회개기도를 하려고만 하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어떻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는지를 정확히 깨닫고 믿음으로 온전한 죄 사함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예수님은 회개만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다. 또한, 베드로도 회개의 세례를 받은 후 죄 사함을 얻으라고 했다. 즉, 회개하는 것과 죄 사함은 별개인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죄 사함을 받기 이전에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라면, 실제 죄를 사함 받는 것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복음을 정확히 알고 믿으려고 하기 보다 회개기도로 죄 사함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본 선교회에서는 이처럼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회개기도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회개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회개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바이다. 그래서 본 선교회에서는 어느 교단보다 회개를 강조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참된 회개가 되었는가를 살펴 신앙 상담을 해주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해 주고 있다. 물론, 거듭난 후에도 회개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회개는 죄 사함 받고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회개와는 성격이 다르다.

첫 회개는 탕자가 자기 길을 버리고 아버지께로 돌이킨 것과 같은 단회적인 회개로 하나님을 떠나 사단이 주는 마음을 따라 죄인으로 살던 사람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 돌아옴으로써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회개라면, 두 번째 회개는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졌을 때,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돌이킴으로 다시 하나님과 사귐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회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요한일서를 보면, 죄를 자백할 수 있는 자격과 대상은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의인이어야만 한다. 이미 온전한 속죄를 받은 의인에게는 죄에 대한 용서가 끝나 더 이상 심판은 없지만, 사단의 미혹과 연약한 육신으로 말미암아 범죄를 할 수 있고, 범죄를 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사귐은 끊어진다. 그때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서 죄를 책망하시고 돌이키게 하시는데 이때 하는 자백은 속죄가 아니라 사귐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일서가 기록된 목적도 아래 말씀처럼, 죄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범죄치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1)

 

분명한 사실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히 9:12)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8)는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미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기에, 다시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가 필요없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범할 때가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더 명료하게 단계별로 설명해 보겠다.

 

①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죄인임을 발견함

② 죄인이 죄를 깨닫고 긍휼을 바라며 회개함

③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어 거듭난 성도가 됨

④ 거듭난 성도가 죄를 범하여 어두움에 거함

⑤ 성도가 죄를 자백하고 뉘우침으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짐

 

위의 ①번 단계는 거듭나지 못한 죄인의 단계며, ②번 단계는 죄인이 거듭나기 위한 마음의 회개 단계며, ③번 단계는 거듭난 의인의 단계며, ④번 단계는 의인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사귐이 끊어진 단계며, ⑤번 단계는 의인의 회개 단계 곧 자백이다. ②번 단계의 회개는 반복될 수 없는 일생에 단 한번뿐인 것으로 죄인만이 행하는 회개 단계인 반면에 ⑤번 단계의 회개는 하나님과 멀어졌을 때마다 돌이키는 것으로 의인만이 행하는 회개 단계이다.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죄인이 죄를 짓는 것과 의인이 죄를 짓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죄인의 범죄는 범죄 자체보다 그 죄인의 위치가 문제이다. 하지만 의인의 범죄는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범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사귐이 문제이다. 그렇기에 죄인은 범죄한 후 심판 받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발견한 후 단번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모든 죄를 온전히 사함 받아 의인으로 거듭나야 되지만, 의인은 죄를 지은 후 그때 그때 자백함으로 육신의 생각과 어두움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사귐이 이어져야 된다.

문제는, 한국의 많은 교인들이 ②번 단계인 죄인의 상태에서 ⑤번 단계의 자백을 회개기도로 변질시켜 반복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죄인의 위치에서 날마다 짓는 범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자백하듯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죄인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늘 죄 용서를 구하지만 영원한 속죄를 받은 의인의 위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회개 기도는 죄인이 거듭나기 위해 행하는 회개도 아니고, 거듭난 의인이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 위해 행하는 자백도 아닌 비정상적이고 비성경적인 것이라는 데에 큰 문제점이 있다.

본 선교회에서는 그렇게 비성경적으로 혼돈되고 변질된 회개기도에 대해 문제를 삼고 성경적인 회개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려고 하는 것이지, 회개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적으로 많은 사례를 들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만, 한정된 지면 사정상 여기에서 줄인다.

 

 

3-1. 죄인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고, 구원을 받으면 의인이 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1)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믿음의 결과가 ‘의에 이르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그 마음이 의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이라는 사실만 믿는 것이 아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듯,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목적,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밝히 깨달아 참된 믿음이 들어오면 그 심령이 바로 죄에서 벗어나 의에 이르게 된다. 그 믿음으로 마음이 의에 이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다.

혹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의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의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교만하다며 이단시하는데,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두 가지 의(義)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온 잘못이다. 로마서 3장 20~21절이나 로마서 10장 3절에 보면 두 가지 의가 나온다. 그래서 성경에는 두 종류의 의인이 있다. 첫째는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이고, 둘째는 죄를 지었지만 죄 값을 지불함으로써 의롭게 된 의인이다. 물론 죄를 짓지 아니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은 의인은 많이 있다.

 

“노아는 의인이요”(창 6:9)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마 23:35)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벧후 2:7,8)

 

로마서 3장 23절이나 5장 12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지구 위에서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의인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의인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약 200번 가까이 나옴)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의롭게 되는 길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에 따라 의인이 되고 안 되는 줄로 아는 길 하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의인이라고 하면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는 길이 있다. 로마서 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그들의 행위로써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는데, 그들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부산서 서울까지 가는데 버스로 가는 길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은 비행기로 버스보다 더 빨리 서울에 간다는 말을 이해 못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의인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베드로와 같이 신령한 하나님의 종들은 죄를 짓지 않아서 의롭게 되었던가? 우리는 아브라함의 허물과 다윗이 범죄한 사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그들을 의인이라고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자기 행위로 의로워지는 길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는 다른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기 행위와 상관없는 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의를 얻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그럼 간단히 성경 중 한 군데만 찾아서 우리가 어떻게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의롭게 되는지를 로마서 3장 23절~24절에서 한번 살펴보자.

“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②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③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문장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모든 사람이”라는 주어로 시작되므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①번 부분을 보면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고,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런데 ③번 부분을 보면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있다. 어떻게 죄를 지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①번의 상태와 ③번의 결과 사이에 ②번 대목에서 진술하고 있는 어떤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가? 죄인이 의롭게 살아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의롭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온전히 사해놓으신 은혜를 입어서, 그 공효(功效)로 우리가 깨끗케 되고, 정결케 되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인을 의롭게 하지 못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되고,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는 무의미한 피가 되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①번 부분은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②번 부분을 정확히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③번 부분에서 밝히 드러난 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로는 완벽하며,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실을 아래 말씀이 증거하고 있지 않는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롬 8:33~34)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등 성경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말씀하시는데,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또한, ‘칭의’라는 용어가 있는데, 여기에도 오해가 있다. ‘칭의’는 우리에게 죄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봐 주신다는 교리인데,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게 해놓으시고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 실제로 죄가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일 죄가 있는데도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관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래 말씀으로 이 부분에 대해 분명히 선을 그으셨다.

 

“…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출 23:7)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 17:15)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게 해놓으시고 의인이라고 하신다. 혹자는 ‘구원 받은 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죄에서 건짐 받은, 죄에 빠져 있는 자’란 말로 ‘물에서 건짐 받은, 물에 빠져 있는 자’ 란 말처럼 앞뒤가 맞지 않다. 물론 우리 모두는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되어도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렇다고 다시 죄인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시니라.”(마 3:17)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마 4:3)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돌을 떡덩이로 만들고, 병자를 고치는 등 기적을 행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만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에 대한 충분한 증거이다. 그런데 사단은 교묘하게 예수님께 접근하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면서 다른 조건을 두어 속이려고 했다. 물론, 예수님은 속지 않으셨는데, 오늘날 사단은 우리들에게도 죄를 짓는 우리 모습을 보여주면서 의인이란 믿음을 갖지 못하게 속인다. 즉 ‘네가 만일 의인이라면’ 하면서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의인이 되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3-2.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고백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도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는데, 어찌 교만하게 우리가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며 우리가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1장 13절부터 16절까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디모데전서를 기록할 당시의 바울의 실제 삶에 대한 고백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13절의 “내가 전에는 …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라는 대목을 보라. 그때의 모습이 죄인 중의 괴수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바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그런 죄인에게도 은혜와 긍휼을 입혀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분 앞에 나가면 나 같은 죄인에게도 은혜를 입혀주시겠구나.’하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인 것이다.(디모데전서1:16)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니라.”고 한 고백은 현재 시제인데 어찌 바울이 과거에 죄인이었던 모습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 고백은 그 앞 문장에 연결된 내용임을 알아야 한다. 본문을 한번 주목해 보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4~16)

 

여기 분명히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대목이 있다. 그러나 그 부분은 현재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간증이 아니다. 그 고백 바로 앞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말씀을 주목해 보라.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는데,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신 그 죄인들 중에 사도 바울자신이 괴수라는 것이다. 즉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하는 고백은 ‘예수님이 죄인을 건져 내시려고 오셨는데,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신 그 죄인들 중에 내가 괴수다.’라는 고백이다. 다시 말하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하는 대목은 바로 앞 부분에서 설명한 ‘죄인’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실제 사도 바울은 구원 받기 전에 사도행전 9장 1절~2절, 26장 9절~12절 등에서 보듯이 복음과 교회를 핍박하는 악한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섰기 때문이다.

만일 이 고백을 현재 시제로 받아들이면, 디모데전서가 기록될 당시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서 가장 흉악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백을 할 당시의 실제 삶은 아래 말씀들처럼 성령의 의지에 강하게 사로잡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의로운 삶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6,27)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행 20:35)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6)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행 25:8)

“바울이 가로되 … 모든 사람도 …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 26:29)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고전 4: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고백은 단순히 그 구절 하나만 따로 떼내서 시제 문제로 왈가왈부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앞뒤 문맥과 연결시켜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마음을 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가장 자연스럽고 모순 없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신학자들 중 가장 분명하게 정통 청교도 신학을 계승했다는 로버트 레이몬드 박사(현재 낙스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는 사도 바울의 자서전식 고백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주해하고 있다.

 

"바울은 회심하지 않은 다소의 사울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다. 동사의 시제가 과거 시제에서 현재 시제로 바뀌는 것은 자서전즉 특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현재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고 해서 이것이 성숙한 기독교 사도요 선교사로서 바울의 경험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인(또는 극적인) 현재 시제'는 그리스어에 있어서 잘 알려진 현재 시제의 용법으로, 저자가 독자에게 과거의 사건과 경험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했을 때 사용했던 방법이다."(Dr.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lolgy of The Christian Faith' 1408p)

 

특히,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석가 중 한 명으로 알려진 매튜 헨리도 바울의 고백에 대해 그의 주석서에서 다음과 같이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구절의 끝에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일급의 죄인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그러한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전에 주의 제자들을 향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었기 때문이었다(행 9:1, 2). 박해자들은 죄인중의 가장 악한 죄인들이다.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다."(Matthew Henry, 'Matthew Henry's Commentary' 디모데전서 주해 중)

 

이처럼 현대 복음주의에 물든 한국 교회는 정통 복음주의 신학과 상관없이, 중세 암흑시대에 자신들의 체제 유지에만 목적을 두고 개혁자들을 종교재판에 회부했던 로마카톨릭과 똑같이 이단 판정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그 칼이 그들을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들 자신의 회개와 생명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