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해온 기도와 믿음의 생활이 아주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나의 일이고 어려움이 있을 때 간구하며 들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으로만 생각 해왔다. 그러나 내 마음의 눈이 크게 떠진 다음에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을 하며 그의 목적을 위해 나를 사용하실 때 기쁘게 쓰임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밀이 깨달아지자 비로소 나를 누르던 모든 짐들을 벗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는 "하나님, 이 환경을 바꿔서 다른 길을 보여주소서"하는 것이 나의 기도였으나 이제는 "주님, 이 환경을 통해 무슨 교훈을 제게 가르치시고 또 역사하시렵니까? 주께서 시작하셨으니 당신의 뜻이 온전히 이뤄지길 원합니다"하는 기도 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기도와 믿음의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불러서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며 기도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 하신 일에 우리가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즉 `있으라!`고 하였고 곧 어떤 것이 생겼다. `있으라!`고 하신 것은 그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계 가운데 행하려하시는 사랑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믿음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형태로 보낸 자기 아들을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비밀의 충만한 것이 그리스도 안에 깊이 담겨져 있다. 결국 하나님의 눈과 그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볼 때 우리는 어떤 문제나 시련에 대해서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약해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실 내게 기도와 신앙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 되고 말았다. 기도할 때마다 흔히 `하나님께서는 이런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하고 하나님께 묻는다. 우리의 인도함은 천국에서 들리는 어떤 음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보여진다 (빌 2:5). 즉 주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역사하심으로 그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거나 포기 하기를 원하실 때 거절하지 말아야 하며 또 허락하시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 24)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이 내재하시는 자기 자녀들을 보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의 소원이 바로 주님의 소원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자기의 일을 이루시려고 자기의 소원을
우리 속에 넣어 주셨기때 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흔히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그 동기에 대하여 너무 두려워하는 것 같다. 우리를 그의 자유로운 아들이 된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인색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담대히 구하지도 못하고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무시하실지도 모른다`는 겁을 먹고 위축되기도 한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이 `믿음의 말씀`이다. 바울은 이것을 무슨 의미로 사용한 것일까?(롬10:8) 우리는 생각만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 가운데 꼭 하고자하는 것을 골라서 `이것을 하겠다. 저기에 가리라...`하는 것이다. 즉 이것이 믿음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내가 믿고 또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나의 자유의지를 적용시켜 이것을 한다거나 저것을 그만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말씀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어떤 것과 나 자신이 하나로 연합되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이제 믿음의 기도 가운데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우리의 믿음을 올리자! 이제까지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자기나름대로 설정한 수준에서 머물러 왔고 또 세상의 수준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제 눈을 크게 뜨라!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상황을 주시고 우리 마음에 어떤 소원을 두셨다면 즉, 어느 처지에 우리를 인도하시고 기도 제목을 주셨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세우시고 또 필요한 것은 일일이 공급하시려는 의도가 계시기 때문임을 깨달아 담대히 그를 의지해야 한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65:24)
이제는 말씀하신 그대로 살아가자. 믿음의 기도가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신 것은 어떤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비유라고 생각하여 믿음의 기도의 위력을 약화시키지 말라.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신다.(롬4:17)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이성이나 감정 혹은 지식과는 정반대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문제들을 해결했는가 보자. 모세는 흥해를 건너기 전에 백성에게 외쳤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14:13) 여호수아는 요단강에 서서 사흘동안 유숙한 후에 강을 건너라고 명했고 여리고성 앞에서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했다(수 6:16).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향하여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라고 외쳤다(삼상17:45~46). 또한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왕상17:1)고 고했다.
예수님은 성난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셨고, 귀신들린 자에게는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으며, 어부들에게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베드로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다.
나의 친구 리즈 하우엘즈는 그의 선교회가 거의 붕괴할 처지에 이른 적이 있었다. 재정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당해 35명이나 되는 선교사를 도을 수도 없이 거의 포기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하우엘즈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C.T 스터드를 통해 시작하셨고 세상에는 아직도 복음을 전해야 할 때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하며 의지하였다. 특히 마가복음 11장 24절의 말씀을 약속으로 붙잡고 감사함을 드렸다. 그해에 열명의 새로운 일군이 생겼고 다시 년말에는 15명이 더 가입하여 25명이 되고 다음 해에 다시 50명이 새로 일하게 되어 3년만에 75명의 일군을 얻었다.
그들은 헌신적인 사역자들이었고 우리는 한번도 어느 사람이나 단체에 원조를 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이 증명되었다 (히11:1). 그후 오늘날까지 해마다 선교의 문이 열렸고 수 백개의 개척교회가 세워졌다. 이제 선교사는 1,200명으로 늘었고 그들은 35개국에 퍼져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성경의 약속은 히브리인에게 주어진 것이나 똑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에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만드시고 보호하시는 자녀이므로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간에 우리에게 생길 수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두신 믿음에 따라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이나 세상의 것들에 믿음을 둔다면 그런 것에 의해 인도를 받아 노예처럼 묶일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의 눈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를 찬양하고 그에게 의지할 때 그는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되며 비로소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나타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왜 하나님이 나를 이런 곤경이나 처지에 빠뜨렸는가?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자유함을 받은 자녀의 자격을 감사하면서 마음의 소원을 아뢸수 있어야 한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다(요17:10). 이미 공급선은 그곳에 있다. 승리는 이미 획득하였다. 우리를 위협하고 위축시키려는 사단의 계략이 아무리 강하고 교묘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모든 것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도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25, 32)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이며 이 약속은 사실대로 되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붙잡기만 하면 절대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언제나 사실 위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높은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아랫층 계단을 디뎌야 하는 것과 같이 현재 주어진 단계와 그 처지에서 믿음을 구사하여야만 다음 단계에 오를 수 있다. 막연한 것이나 사실 아닌 것을 사실인 것으로 착각하거나 고집하여 붙잡고 있다면 그 결국은 하는 수 없이 비참하게 되고 만다. 오늘날과 같이 움직이는 신앙이 필요한 때도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의 권위를 의지하고 믿음을 가지고 그대로 산다면 어떤 경우에서나 아무에게도 또 무엇에게도 압력을 받지않는 온전한 자유 가운데 거할 수 있다.
믿음의 말씀은 곧 생명의 약속이며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승리가 내것으로 현실화된다. 이제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겁을 먹을 필요도 없고, 자기의 처지를 보며 위축을 당할 필요가 없다. 움직이시며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한번도 자기의 목적하신 일을 실패하신 적이 없고 그 때를 놓치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기도와 믿음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