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장 1절입니다.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에 많은 감명을 받고 은혜를 입는데, 전에 내가 창세기 27장을 많이 읽었지만, 한번은 창세기 27장을 읽다가 내 마음에 아주 충격적인 감화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 계속해서 창세기 27장은 내게 소망과 힘이 되어 주고 기쁨이 되어 주었는데, 창세기 27장이 어떻게 시작되느냐 하면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이것으로 시작되는 거지요.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이삭이 맏아들 에서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언제 죽을는지 모르니까 너는 전통과 활을 메고 들에 가서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와라. 내가 먹고 마음껏 축복하리라” 그런데 그 틈에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받으러 갔는데, 야곱은 매끈매끈한 사람이고, 에서는 털 사람이기 때문에 야곱이 아버지 앞에 나가 ‘내가 에서입니다’ 하고 속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느냐 하면 그 가능한 이야기를 창세기 27장 1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만일에 이삭이 정확하게 보았다면 금방 야곱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너 목소리도 야곱이고, 너 손에 염소가죽 같은 것을 붙여 가지고 왔네. 그래서 내가 속을 줄 알아? 이놈 넌 야곱이야.” 그렇게 했을 것인데 성경에 보면 이삭은 속고 야곱이 에서인줄 알고 저주를 내리지 않고 복을 내리는 장면을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성경을 읽으면서 민수기 2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추하고 더러운 악과 죄를 보시지 않기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보시는데, 분명히 이것은 저주를 받아야 하고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아야 하는 야곱인데, 이삭이 자기 형 에서라고 하는 이야기에 속을 수 있었던 이유는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이야기인데, 하나님의 눈이 어둡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 우리의 허물을 보실 때, 우리의 패역을 보실 때 하나님이 그냥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시기 하나님 눈에는 우리의 어두운 죄악이, 더러운 패역한 일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지요. 성경은 이런 이야기들이 참 많이 나오는데 어느 날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의 많은 재산을 허비하고 거지가 되어 더러운 옷을 입고, 더러운 모양으로 아버지 앞에 나타납니다. 상거가 아직 먼데 아버지가 멀리서 뛰어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아버지는 자기 사랑하는 아들 얼굴을 봤지, 아들의 머리에 있는 때나, 옷에 묻은 더러운 돼지 똥이나 그런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을 줄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시는 그 눈, 그건 그냥 그 눈이 어두웠기 때문에 ‘내가 큰 아들 에서입니다.’ 했을 때 아버지 속아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 눈을 감고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예수님께 베푸는 모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희들이 베넹정부와 IYF사이에 이제 모든 것이 해결 되어서 베넹정부에 우리가 가서 IYF활동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길이 열려 진 것을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베넹은 불어를 쓰는 나라인데 거기에 가서 저희들이 IYF 행사를 통해서 베넹에 많은 젊은이들께 복음을 전하는 그런 길을 열어 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너무 감사합니다. 이런 길들이 열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그런데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신다’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면 우리 허물이 보일 수 없고, 우리 악이 보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의롭다고 말씀하셨고 거룩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거죠. 마치 야곱이 자기는 야곱인데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했을 때 아버지가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만져보니까 에서처럼 보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에서로 인정하고 복을 주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그냥 내 이름으로 ‘하나님 저 박옥수 목사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그럴 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받아 들여진다는 것이지요.
제가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을만한 조건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작년 한해, 하나님께서 우리 선교회에 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푸셨고, 새해가 들어 얼마 되지 않아 계속해서 하나님이 우리 앞에 문을 열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합니다.
이번에 미국에 있는 수많은 학생들이 브라질에 가서 영어캠프를 했습니다. 영어캠프를 했는데 시간 스케쥴에 따라서 복음을 전해 많은 학생들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미국에는 포르투갈어를 잘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대부분 영어하는 사람들이 통역을 의지해서 했는데, 영어캠프가 너무 은혜롭고 또 복음을 전해 많은 학생들이 구원을 받은 일들에 너무 감사하고. 지금은 파라과이에서 영어캠프를 하고 있는데 영어캠프하는 사람들도 즐거워하고 학생들도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또 이런 지혜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큰 축복들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똑똑해서가 아니라, 의로워서가 아니라, 거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 일을 하시고 그 일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것을 볼 때에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가지신 똑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이삭 앞에 야곱이 나가서 복을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도 우리의 노력이나, 에서처럼 우리의 수고한 것으로 아버지 앞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데 리브가가 준비한 모든 은혜로 나간 것처럼 우리도 아무 것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 십자가의 은혜를 가지고 나간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고 우리의 패역을, 우리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들의 크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귀한 역사가 일어날 줄 믿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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