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목회를 시작하자마자 목회자세미나에 갔다. 늦게 시작했으니 목회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넘쳤다. 마침 무료로 하는 수원 흰돌산 목회자수련회 겨울 수양회에 참석했다. 2.3천명의 목사,사모들이 모였다. 처음보는 광경이라 좀 충격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모인 분들의 행색이 대부분 매우 초라하고 옹색했다는 것이다.
"저분들도 열심히 한다고 했을텐데----. 음! 정신 바짝 차리자! 나라고 저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기도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 기도원 원목이 교단의 선배였고 고향분이셨기 때문에 호감이 갔지만 무엇보다도 기도를 상상 이상으로 하신다는 것과 통쾌한 설교스타일이 더욱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분은 나의 목회의 모델이 되었다. 하루 4시간 기도는 기본! 나는 그렇게 해 볼려고 애썼지만 그렇게 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그 분을 흠모하며 4년동안 봄,가을로 열리는 목회연구원을 다녔다. 여름겨울 수양회도 빠질 수 없었다. 미래의 유능한 부흥사를 꿈꾸며 부흥사연수원을 어려운 형편인데도 등록비를 내며 6번을 마쳤다. 집회가 5일 열리면 난 거의 금식했다. 나의 진심과 열심을 하나님께 보이고 능력받아 목회 성공하리라! 말씀이 끝나고 통성기도 시간이 되면 난 모든것을 던져 기도하려 몸부림쳤다. 기도하다 죽으리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마음과 힘을 다하여 부르짖다 보면 어느 정점에서 눈물이 터졌다. 그 느낌은 황홀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이 차질 않았다. 그러고 나면 나만 아는 긍지와 자부심이 나를 감쌌다. 그렇게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식욕이 사라지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난 영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된 줄 알았다. 식욕을 이겼고 입술을 제갈물렸으니 얼마나 신령한가? 그러나 일주일이 못 가 식욕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혀는 3,4일이면 풀렸다. 아! 난 또 육으로 돌아갔구나! 아직 멀었어. 어쩌지? 기도하자! 지하 교회로 달려가 찬송가를 틀어놓고 날마다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 느낌은 회복되지 않았기에 다음 집회를 기약해야 했다.
내가 개척한 교회의 이름은 "풀무교회"였다. 뜨거운 교회! 무엇이든 다 녹일 수 있는 용광로같은 교회! 성경적인 근거가 분명히 있었고 또한 이름이 특이해서 난 그렇게 지었다. 나 먼저 녹이려 애썼지만 녹지 않았고 아무리 바람을 넣고 불똥을 튀겨도 어느 누구하나 녹을 기미가 없었다. 그럴수록 나는 충직하고도 충직한 풀무꾼이 되어 그 풀무질의 강도를 높였다. 언젠가는 불이 붙으리라!
목자가 들에서 양과 같이 야영하듯 지하 교회에서 몇 달을 잤다. 나의 마음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사 은혜를 베풀어 주시리라 기대했다. 나는 곧 꿈을 꾸기 시작했다. 예수님(?)도 나타났고 천국(?)도 보였다. 눈을 뜨면 간 밤의 꿈을 우선 적었다. 무슨 영감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나에게는 정확한 해몽능력이 없었다. 대부분이 황당하고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그래도 난 무엇이 있겠거니 하고 메모하는 일을 계속했다. 공책이 여러권 쌓여갔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신학교 다닐 때 자취방에 불이 나 내 전재산이 다 연기로 사라졌다. 마침 후배가 맡긴 톰슨성경이 타지 않고 신학책 두 권과 함께 그을린채로 남았다. 신기했다. 후배에게 성경책을 하나 사 주고 나는 그 성경책을 내 머리맡에 늘 펴두고 읽었다. 일년에 열 몇번을 통독한 적도 있었다. 성경을 많이 읽어야 되는 듯 싶었기 때문이다. 공부할 시간에도 공부를 미루고 성경을 읽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내심 기쁨이 있었고 뿌듯했지만 마음에 남는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아지지 않는목회!
흰돌산 기도원 목회자 세미나 4년의 수고가 아무 열매없이 끝났다. 부흥사 자격증까지 땄지만 나의 목회는 제자리라 그 자격증이 휴지가 되어 버렸다. 세미나 시간에 나는 늘 앞자리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 많이 사모했다. 한 학기동안 서대전역에서 수원역까지 기차로 다닌적이 있었는데 나는 가는 동안 기차의 맨 뒷칸 밖으로 나가서 울며울며 주를 불렀다. 갈급했고 또 성공하고 싶었기에! 기차소리에 내 기도소리는 부서져 사라졌지만 내 안에는 자부심과 소망이 넘쳐났다.
교회가 답답하면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며 눈물이 찔끔찔끔 나도록 소리치며 내 마음을 찢었다. 그러나 목회는 여전히 나아지질 않았다. 수원의 세미나 발길을 끊었다. 그렇게 해도 안 되는데 더 이상 다닐 이유가 없어졌다. 낙심이 되었다. 그 원장목사님의 뒤를 잇고 싶었는데-----. 죄송한 마음까지 들었다.
한동안 쉬다가 40일 금식을 작정했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금식하다 능력을 받든지, 아니면 죽든지 해야했다. 금식은 금식이 아니라 굶식이었다. 허기를 견디는 것과 시간 때우기가 금식의 실체였다. 한 끼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내가 30일을 견뎠다. 몸이 많이 여윈 나를 본 교회 뒷 집 감리교회 집사님이 어느 권사님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 분은 성령의 음성을 가슴에서 직접 듣는 분이라 했다. 그 분들을 만나 교제한 후 금식을 중단하고 같이 일 주일 두 번 집회를 시작했다.
말씀을 들으니 신선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와 계시니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솔깃했고 가히 혁명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음에서 성령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다니-----! 그럴 수 만 있다면 -----! 난 목사의 체면을 던졌다. 권사의 말씀을 들으며 매달렸다. 목회성공을 위하여! 부흥을 위하여!!
말씀이 끝나면 성령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기도에 들어갔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다양하니 이끄는대로 이끌리라 했다. 소리를 질렀고 울었으며 몸부림치다 뒹굴었다. 기도가 끝나면 엄청난 두통에 시달렸지만 성령의 역사려니 하며 견뎠다. 아내는 산발한 채 고개를 돌리며 늘 울었다. 식사대접 하느라 아내의 수고는 컸지만 잘 감당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교인이 생기는 것도 아니어서 집회를 그만두었다. 그 권사는 다른 교회로 옮겨 집회를 계속했지만 난 가지 않았다.
고향선배를 우연히 만나 어떤 성경공부에 이끌렸다. 말씀을 기가 막히게 풀고 있었다. 구약과 신약을 짝으로 연결하여 자기들의 교리를 주장하는데 그 정확성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비유가 작위적이었고 비약이 심했다.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자기들의 총회장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며 말세에는 그 아래 모여야 거룩한 백성이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듯 했다. 아니다 싶어 몇 달 하다 그만두었다.
어느 주일날 예배에 신사분 둘이 왔다. 교제하다 보니 한 분이 선교사였다. 1:1 성경공부를 제안하길래 흔쾌히 응했다. 공부한다는데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교회로 와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며 성경을 푸는데 정말 탁월했다. 성경을 예수의 일로 푸는 공부였는데 일찌기 들어보지 못한 내용이라 난 열심히 배웠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을 예수님에게 맞추어 푸는 아주 좋은 공부였지만 역시 지식이었다. 몇 달을 하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내 마음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빨리 결단하고 자기들의 모임에 들어오라고 은근히 종용하길래 그만두었다. 그 분의 수고를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교회 문을 닫고!
거창하고 야심찼던 나의 목회는 7년 반 만에 끝이 났다. 크지 않은 액수의 은행대출금과 이자를 연체한것이 문제가 되어 형님이 해 준 집을 경매로 날렸다. 액수가 크지 않았기에 여유를 부렸는데 예상보다 빨리 경매가 되어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도 큰 손해없이 집을 비웠다. 나는 교회를 닫고 집을 살리자 했고 아내는 교회를 닫을 수는 없다며 자주 다투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교회도 닫아야 했다. 교회 월세 밀린 것을 보증금에서 제하고 남은 돈과 남은 경매대금을 합하여 선화동으로 이사했다.
이사하면서 대출을 받기로 했다. 다 된다던 대출이 계약전날 저녁에 어떤 이유로 안된다고 연락이 왔다. 결국 계약금에서 위약금으로 50만원을 떼였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부동산에서는 농협에 가서 난동을 부리라 했다.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목회도 못하고 세상물정도 모르는 바보멍청이! 눈물이 났다. 난 교회도 없으니 이젠 근처의 감리교회에 가서 소리내지도 못하고 조용조용 기도해야 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