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 24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저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생각하고 하나님 생각의 차이가 참 많이 있는데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졌느냐 하면 우리가 선을 많이 행해야, 열심히 노력해야,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줄로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하면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의를 행하고 내가 선을 행한 내 의에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 구원이 안 됩니다. 이제 내가 가진 모든 의가 무익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고 내 의를 버려야 예수님의 은혜의 의를 얻을 수가 있는 거지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도 뒤에 이렇게 보면 구원받고 자기 의를 세우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구원은 가짜인 겁니다. 진정한 구원을 받게 되면 내가 선을 행한 것, 내가 율법을 지킨 것, 내가 구제를 한 것, 내가 기도한 것, 이런 것들이 나를 구원하는데 손끝만큼도 도움이 될 수 없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나를 죄에서 건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구원이 형성되지,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내가 잘한 의, 그것이 구원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진짜 구원이 아니지요.
내가 베트남에 가서 어느 날 한 지하 교회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14년 동안 하나님 이름으로 감옥에 있다 온 사람입니다. 내가 상담을 해보니 구원을 받은 게 아니예요. 그분은 14년 동안 감옥에 간 것, 그것이 구원의 조건인 거예요. 그래서 내가 구원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분이 막 화를 내는 거예요. “목사님 14년 동안 감옥에 가보는 것 상상이나 해본 적 있습니까? 내가 14년 동안 감옥에 있는 동안에 내 아내가 어떻게 생활했고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거지 노릇을 했고 그 어려움을 겪으며 14년 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하나님 믿는 믿음이 없이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게 믿음이지.”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믿음인지는 몰라도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그건 구원이 아니라고. 우리가 뭘 해서 우리 행위로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이 아니라고. 구원은 순수하게 우리의 노력이 들어가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십자가의 피 그 외에 다른 걸로 이루어지면 구원이 될 수 없다고 설명을 했는데 나중에 그분이 막 화를 내면서 가겠다고 가는데 내가 가는 건 자유라고. 그러나 행위로는 절대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분은 14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자기 가족이 고통을 당하고 그것이 구원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그게 너무 어리석은 거예요. 우리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만큼 주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고 해도 내가 행한 어떤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제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구원을 받고 난 뒤에 구원받은 우리가 좀 더 열심히 기도하고 충성되게 일해야 하나님 나를 축복하겠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둘째 아들의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이 뭘 해서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아버지를 기쁘게 할 만한 조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기쁨이 된 건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이 그를 아버지 기쁨을 만든 거지 자기가 뭘 해서 아버지가 기쁘게 되어진 건 절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구원을 받고 난 뒤에 내가 좀 더 열심히 하면 하나님 기뻐할 줄 알고, 죄를 안 짓고 성실하게 살면 기뻐하실 줄 알고, 내가 헌금을 많이 하면 기뻐할 줄 알고, 주님께 봉사하면 기뻐할 줄 알고... 우리는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아 되어지지 않는다는 건 정확히 알면서 구원 뒤에 오는 믿음의 삶도 똑같이 구원과 같은 건데 또 행위에 매여요. ‘내가 구원받고 이런 걸 해야 하나님 내게 역사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정도 해야 하나님 나를 복주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야 하나님 나를 지키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으러 나갈 때 마다 내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정말 부정적인 면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성경을 읽어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 앞에 와서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손에 가락지를 끼고 발에 신을 신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그 영광스런 일을 할 때 그가 뭘 해서 아버지가 기뻐해서 그에게 그런 일을 베풀었습니까? 그가 돈을 많이 가져왔기 때문에? 그가 충성되었기 때문에? 아닙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그 모양은 아버지에게 절망적인 것 외에 잘한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기뻐했습니다. 왜? 자기 아들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로 신앙은 그런 겁니다. 우리가 잘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아들이란 그 자체만으로 아버지께 기쁨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께 돌아오는 그 자체만으로 아버지에게 만족이 되고 아버지에게 기쁨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리석게 내가 뭘 해서 아버지의 기쁨이 되려고 생각하고 내가 뭘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나를 만족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게 문제가 되는 건 못할 때 아버지가 나를 기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어 신앙이 되어질 수가 없다는 거지요.
여러분 우리가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 내가 뭘 잘해서 구원을 받고 잘 해가지고 복을 받고 그게 아니라 구원받을 때와 똑같이 믿음은 똑같은 겁니다. 구원받을 때 우리 행위가 손끝만큼이라도 들어가면 구원이 아닙니다. 내가 뭘 했기 때문에 구원이라면 그건 구원이 아닌 것처럼 구원받고 난 뒤에도 내가 금식했고 십일조를 했고 내가 기도를 했고 내가 성경을 읽고 내가 뭘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다면 그 자체는 믿음이 아니라는 거지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구원받을 때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복을 입을만한 아무 조건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우리에게 복을 준다는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 살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다윗도, 그 하나님의 종 모세도, 아브라함도 다 실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완벽하고 잘해서 복을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복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못 주시면 우리보다 하나님이 더 속 타실 거예요.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막 기뻐하고 뭐든지 둘째 아들에게 주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여기서 읽을 수 있잖아요. 지금 아버지가 우리에게 그러신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실수하고 허물 많고 죄짓고 그랬지만 하나님이 그걸 보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와 복을 주시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내 자신을 보지 말고 다만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가야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볼 필요가 없고 내가 잘한 것도 볼 필요가 없고 내가 좀 잘했다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내가 잘못했다고 하나님 나를 미워하신다 그런 생각하지 말고 내가 잘하고 잘못하고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이 나를 받으신바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 내 속에 능력으로 일하실 걸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걸 잘 모르니까 ‘내가 잘못하고 실수했으니까 하나님 나를 사랑 안하실 거야. 나를 미워하실 거야. 내게 역사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림이 참 많은데 그건 큰 오해입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하신다는 그 하나로 모든 문제를 다 덮을 수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왔어도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그것 때문에 복을 주지 아들이 선하거나 깨끗해서가 아니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둘째 아들처럼 추하고 더럽고 부족하지만 아버지 앞에 담대히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복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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