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장 17절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바라바는 민란에 살인을 하고 체포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였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바라바는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은 어느날 자기가 있는 감방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제는 바라바 하나가 아니고 두사람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고 바라바는 죄가 있는 죄인이지요. 둘 중에 누구 한사람이 멸망을 받아야 하고 한사람이 생명을 얻어야 하는 그런 운명에 놓여있었습니다.
빌라도가 백성들에게 질문을 하지요. “명절을 당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는데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백성들이 일제히 바라바를 살려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바라바는 구원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에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한 뜻을 가지시고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하시려고 하는 강한 의지를 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는 이런저런 사건들이 참 많이 있는데 그걸 다 성경에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서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이야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런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알 수가 있지요.
그러면 여기 바라바라고 하는 이 사람은 분명히 범죄를 하고 잡혀서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바라바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되었는데 둘중에 하나는 사형을 당해야 하고 하나는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둘중에 누군가 한사람은 사형을 당해야 하고 둘중에 누군가 한사람은 살아야 하는데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없어서 살면 바라바는 사형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자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고 죄가 많은 바라바는 죄없이 다시 자유의 몸이 되어서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정말 그 바라바를 한번 만나보고 싶거든요. 그런데 만날 수가 없지요. 확실한 사실은 그 바라바가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내가 자주자주 느끼곤 합니다. 바라바와 똑같은 방법으로 내가 구원을 ?았거든요. 바라바가 죄를 짓고 저주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나도 범죄하고 악해서 멸망받고 저주를 받아야 할 사람이었는데 어느날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이젠 나하고 예수님하고 하나가 되면서 예수님이냐, 나냐? 둘중에 한사람이 멸망을 받기로 되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멸망받기를 싫어하신다면 내가 어차피 멸망을 받아야 하는데 다행히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멸망을 받으셨다는 거지요.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자 이야기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간음한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서 돌에 맞아 죽기 위해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위치에서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이제 예수님하고 이 여자가 하나가 된 거지요. 그 추하고 더러운 간음한 여자와 거룩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중에 하나는 멸망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보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그 여자에게 ‘너는 죄없다’는 겁니다. 그건 말이 안 되지요. 분명이 죄를 지었는데, 분명히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죄가 없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분명히 죄를 지은 그 여자에게 죄가 없다고 한다면 그 여자가 지은 죄는 어디에 가겠습니까? 예수님이 책임을 져야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얼마 후에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그 여자의 죄도 가져갔기 때문에 그 여자는 간음한 그 죄에서 벗어나고 죄인이 아니고 거룩한 사람으로 일컬음을 입을 수가 있었다는 거지요.
여러분 이 성경 이야기는 전부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없이 그냥 있으면 우리는 저주를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의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여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만일에 하나님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고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가 저주를 받느냐, 아니면 예수님이 저주를 받느냐? 둘중에 하나는 저주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을, 죄를 지은 우리가 무얼해서 의롭게 되어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외에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구원받기에 예수님이 흘린 그 십자가 외에 절대 다른 방법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내가 선을 행해서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계명을 지켜서 내가 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은 절대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뭘해도 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기 위하여.
우리가 죄를 지었고 예수님은 거룩한 분인데 그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가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죄인이 되고 반대로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는데 예수님은 범죄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죄를 가지고 가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면 죄없는 예수님이 죄인이 되었다면 죄있는 우리가 의인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죄없는 예수님이 죄인이 된 것처럼 죄있는 우리가 의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라바를 대신해 죽었고 바라바는 자유의 몸이 된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가 이제는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구원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라바는 사형을 당할 만한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죄를 예수님이 다 가져가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오늘 저녁 여러분과 나는 이 시대의 바라바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멸망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멸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7장에 있는 이 말씀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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