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장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제가 몇 년전인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만 한번 내가 어쩌다가 우연히 나를 한번 바라봤어요. 내가 깜짝 놀란건 ‘이야 나는 목사 가운데 너무 형편없는 목사다. 내가 이래가지고 무슨 하나님의 종이냐? 내가 나를 봐도 너무나 하나님 앞에 불충성스럽고 나태하고 태만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번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 내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들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는지 몰라.’ 처음에는 내가 구원을 받고 다른 전도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요즘은 전도자도 많은데 하나님 나를 꼭 버리실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내 마음에 들어서 내 마음이 울적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도 여전히 제가 대전도집회 강사로 말씀을 전했는데 저희들 교회 일년 행사 가운데 겨울수양회가 있고 봄에 대전도 집회가 있고 그 다음에 또 봄에 해외 전도집회가 있고 여름 IYF 세계대회, 여름수양회 이렇게 연결되어 가는데 그때는 IYF 세계대회 같은 건 없을 때인데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겠다.’ 내가 부산에 구덕체육관에 강사로 갔는데 내가 거기 강사로 서 있는게 너무 감사한 거예요. ‘이번 집회를 마치고 나면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 안 버리실까?’ 또 그다음 집회 강사로 가서 ‘내가 이게 마지막일는지도 몰라.’ 그런 마음이 내 마음에 들었어요.
내가 내 자신을 보면 내가 너무 연약하고 부족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뭐 때문에 나같은 걸 쓰시겠나? 그러다가 히브리서를 읽었는데 히브리서 말씀 가운데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여기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 말씀을 읽으면서 내 마음에 깜짝 놀란 거예요. ‘야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하나님 나를 버려야 하는데, 떠나셔야 하는데, 그 약속 때문에 하나님 나와 함께 계시는 거구나.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구나.’ 그 말씀이 들어오면서 내 마음에 참 평안이 왔고 그 이후에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셔서 지금도 많은 부족함을 가지고 있지만 단에 서서 주일마다 말씀을 전하다보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려고 하는 그 의지를 읽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서. 노아는 하나님 마음에서 인간을 심판하시려는 그 의지만 읽은 것이 아니라 또 하나님 마음 다른 한쪽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읽었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눈빛 속에 있는 은혜를 발견했더라.”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해라 하시면서도 “너는 너를 위해서 잣나무로 방주를 지어라.” 그 이야기는 죄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지만 은혜를 베풀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그 마음을 노아는 읽었습니다. 그래서 죄는 심판했지만 그 구원의 은혜를 입어서 노아는 살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뒤에 선악과는 우리에게 죄를 가르져주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우리는 죄가 뭔지 모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발견하고 나면 우리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죄인만 되어야 하는게 아니라 내가 지은 그 죄도 발견해야 하지만 나를 구속하시고 죄에서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도 깨달아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지 아니하고 내가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할 때는 죄인이 될 수 없고 죄인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내가 죄인인 줄은 깨닫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나는 죄인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한동안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은혜는 깨달았지만 내가 주님 앞에 허물을 범해 잘못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하나님 나를 버리실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말씀 속에서 또 다른 한 말씀이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여기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하리라.” ‘아 그럼 나를 버리지 않겠다.’ 그날부터 나를 버리겠다는 그 마음에서 내가 벗어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을 팔고 난 뒤에 한없는 죄의 가책이 그를 엄습해 왔습니다. 그게 선악과의 영향인 것입니다. 그 죄가 가책을 줘서 가룟유다가 막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그래서 그 돈 은 30을 가지고 전에는 돈이 그렇게 좋아서 돈으로 예수님을 팔았는데 그 은을 들고 성소에 뛰어들어갔습니다. 제사장들이 있는 방에 가서 문을 확 열어젖혔을 때 제사장들이 쳐다봤습니다. 가룟유다가 울부짖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 제사장들이 냉담했어요. “그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스스로 당해라. 이미 우리 흥정은 끝나지 않았느냐?” 이제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그것을 팔지 않은 상태로 돌이킬 수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은을 성소에 집어던지고 목매어 자살해 버렸습니다.
가룟유다는 자기가 죄를 범한 건 알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알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구약 예언에 보면 그가 망할 멸망에 대한 예언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 가운데 한가지는 인간이 저지른 어떤 죄도 예수님이 구원할 수 없는 죄는 하나도 없고 우리가 아무리 깊은 구덩이에 빠져도 예수님이 건져낼 수 없는 구덩이는 없으며 우리가 아무리 더러운 죄에 빠져도 주님이 씻을 수 없는 더러운 죄는 없습니다. 가룟유다는 그 죄에 대한 사실을 선악과로 말미암아 깨닫고 양심에 가책을 받고 괴로워했지만 노아가 발견한 은혜를 알지를 못했기 때문에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참 많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그 영향으로 우리가 죄를 깨닫고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것은 선악과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주는 것이죠. 우리는 그 사실만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하나를 알아야 하는 것이 더러운 죄인인 우리의 죄를 눈처럼 희게 씻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은혜를 우리는 깨닫고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가 죄를 짓는 능력보다 커서 우리는 더러운 죄를 지었지만 주님은 능히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죄에 대한건 알지만 참 구원의 은혜를 알지 못해서, 깨닫질 못해서 여전히 자기 죄의 가책과 두려움 속에 헤매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한때 구원을 받았지만 내 자신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꼭 나를 버리실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어서 ‘하나님 나를 버리실거야.’ 하는 그런 생각에 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의 잘못을 받으시는 주님께서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 약속을 볼 때 내가 믿음 가운데 다시 주님이 나를 버리시겠다는 그 생각에 매이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경 한부분만 알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은 죄에 매여서 고통하라고 깨닫는 게 아니고 죄를 깨닫고 하나님 은혜 앞에 나와 구원을 받고 거듭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 죄를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죄를 깨닫긴 하는데 그 죄를 구원하신 하나님 은혜를 알지 못해서 사람들이 여전히 죄속에 고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죄를 범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어떤 죄도 주님이 씻으실 수 없는 죄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깨끗케 하신 그 사실도 믿어야 합니다. 한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된 것처럼 한사람 아담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되었다면 한사람 예수 때문에 의인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다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에 의해 태어났다면 예수님으로 다시 태어나면 여러분이 의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은혜 가운데 산다면 우리가 범한 죄가 다시 우리를 정죄 속에 묶어두질 못하고 마치 우리가 죄를 범했지만 다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뻐하며 복된 삶을 살게 될줄로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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