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오아시스를 찾아서
최웅렬
이 글에 앞서 고마우신 두분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림을 지도해 주시던 김 아영 선생님, 최 영식선생님. 더운 여름이나 겨울에는 찾아온 제자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김 아영 선생님은 대학 강단에서 후진을 양성하시며 여러 가지 사회봉사활동을 하시고, 최 영식선생님은 소양호를 건너 삼막 골 폐교된 분교로 들어가 그림에 정진 중이시다. 틈을 내 춘천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선생님을 처음 만나 붓을 잡은 지 13 년 세월은 쉬 흘러도 화공(畵功)은 세월이 갈수록 어렵게만 느껴진다.
문진으로 누른 종이 위에 먹을 갈아 흠뻑 먹인 붓으로 돋보기의 초점을 맞추듯 수묵의 조화에 젖어들지만 늘 초심의 마음이다.
그림의 공력은 일생을 쌓아도 그 길이 보일 것 같지 않는, 아득한 미지의 세계로 이어진 길을 가는 듯 긴장과 초조의 연속이다.
춘천과 평창은 같은 강원도라지만 가깝지 않은 거리, 지금이야 영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시원스레 뚫려 승용차로 1 시간 40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그 때만해도 꼬박 3 시간이 걸려 왕복 6 시간 거리였다.
일주일에 한 차례 라지만 아침 7 시에 집을 나서면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곤 했으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음 날까지 녹초가 되었지만 화가의 꿈이 이루어져 가는 현실이 너무 행복했다.
그러던 중 모 방송국 장애인 프로그램에 문의를 해 구족회화를 알게 되었고 91 년 가을에 서울 상계동에 있는 사무실을 방문하여, 사업과 회원들의 활동을 위해 관리업무를 하시는 이 미봉 전 부장님의 주선으로 세계협회의 은혜를 입어 회원이 되었다.
유수 세월에 인생의 무상함이 절로 느껴진다.
생후 7 개월부터 뇌성마비로 두 손을 쓰지 못하는 큰아들에게 일곱 살 때, 숟가락을 발가락에 끼워주셨던 아버지는 3 년 전 선산에 묻히셨고 홀로 남으신 어머니는 쉰 일곱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많이도 늙으셨다.
부모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내 꿈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찾은 아버지의 영전 앞에 바쳐진 안개소국 같은 미소로 반겨주시는 아버지,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셨던 아버지가 가슴 저리게 그리워진다.
발로 숟가락질 할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유별나게 좋아했던 난 학창시절 미술시간이 제일 좋았고 선생님들의 격려로 화가의 꿈을 꾸게 되었으며, 학교를 졸업하고 홀로 학문에 정진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때때로 과로 때문에 코피가 자주 터졌다.
문인으로 화가로서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인들을 만나 상호 교류하며 나의 세계를 개척해 갔으며, 그 속에서 시야를 넓혀나갔다.
많은 사람들 중에 더욱 잊지 못할 사람이 있으니, 사진작가 고 주서 선생님이다.
96년 한시 백일장에서 인연이 되어 개인전을 할 때마다 사진을 찍어주시고, 일이 있을 때마다 늘 모든 일을 제쳐놓고 찾아오시는 참 고마우신 분이다.
결혼사진도 찍어주겠다고 웃으시며 약속하신다. 생각해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그렇게 살아왔다. 심지어 스님, 목사님, 신부님까지 말이다.
시와 그림과 학문에 마음을 쏟으며 인생을 살아왔지만, 텅 빈 마음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모순이었다.
한 때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술에 젖어 산적도 있었다. 만취된 상태에서 길에 나뒹굴어 잠든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존의 의식과 빛의 진리로 낙심과 절망과 타락의 시간을 뒤로하고 삶의 고삐를 힘차게 당겼다.
사람들과 늘 함께 살아가면서도 인간은 공허한 마음속에 그렇게들 살아간다. 공허는 때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기도 한다.
연인을 향해 불타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꽃을 바치며,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지만 인간에게는 채울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의 근작 시에 사람들은/사람들이 하는 사랑을/사랑이라고 믿고 있지만/그것은 사랑이 아니지./사람들이/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사랑은/사랑이 아니라/거룩함이 떠난 공허한 마음이/공허한 마음을 향한/공허함의 울림이지/사랑은/사람들의 본질 속에 없는 것/사랑이라 믿고 있는 것은/공허한 마음뿐/공허의 씨앗이 심어진/공허의 마음 밭에서/그렇게 공허한 마음을
키워가고 있는 거지./........ 라 했듯이 공허한 마음의 충족과 진리를 찾기 위해 고뇌했다
나를 속이며 거짓을 그려 가는 내 모습이 너무 싫었고, 인간의 관념 속에 갇힌 거짓된 진리가 아닌, 스스로 존재하는 진리 자체의 참 진리를 만나고 싶어 여러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이야기도 접했지만, 내 가슴을 후련히 적셔줄 오아시스를 만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예술은 진리를 추구해가야만 하며 그 순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예술로서의 진리는 물리에 변해 가는 수동적 요소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능동적인 自存(자존)의 본질을 찾아 그것을 예술로 승화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공허와 혼돈의 날이 지나가고, 진리의 질서에서 나오는 자존의 광명으로 표현하게 되는 나의 예술이, ‘억압된 마음, 심히 괴로운 갇힌 영혼’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육체는 비록 혹독한 형벌의 삶을 살지만, 나의 영혼은 무한한 자유의 날개를 펴고 마음의 하늘을 날고 있다.
나의 삶은 기쁨과 행복에 넘치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나는 긴 방황의 끝에서 드디어 청량의 오아시스를 찾았고 나의 여행은 끝났다.
아름다운 유토피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