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 영상교제 말씀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


요한복음 5장 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제가 목회를 하고 선교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형제자매들을 만나면 개인적으로 신앙도 가르치고 복음도 전하면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어디에 익숙해 있느냐 하면,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확인된 사실을 믿는 그런 습관이 우리에게 많이 굳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지라도, 내 눈으로 확인되는 것을 보고 말하려고 하고, 또 내 손으로 만져보고, 병이 나았다면 확실히 나은걸 보고 또 내가 무슨 문제를 두고 기도를 하면 그 기도 응답받는 걸 보고 간증을 하려고 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주님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그래서 내가 확인한 것 말고 우리 주님이 하시는 그 말씀, 전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했지만 그걸 믿게 되기를 바라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가능한 한 눈에 보이는 어떤 확인할 수 있는 것 말고 보이지 않는 약속을 의지하도록 이끌고 계시다는 거지요.

여러분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때 예수님이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병은 다 나았지만 그들의 눈으로 확인되거나 그들이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을 그때 예수님의 눈에는 병이 다 나았지만 그들 눈에는 아직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런데 믿고 가다보니까 그 병이 나았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거든요.

그런 말씀을 우리가 상고해서 읽어보면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된 병자에게 "예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을 때, 이 38년된 병자가 다 나아있는 것을 느끼고 경험하고 일어나서 걸어갔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성경에 보면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 앞에 `나아서`가 먼저 있으니까 나았으니까 자리를 들고 걸어간다는 거지요.

그런네 물론 나았다고 하는 그 말이 하나님의 차원에서 나은 거냐, 우리 보기에도 나은 거냐? 하나님 차원에서 낫고 우리 보기에도 나았다면 우리가 믿음이 필요한 아무 이유가 없겠지요. 그냥 나았으니까 걸어가면 되는데 믿음이라는 건 아직 낫지 않았는데 나은 줄 믿는거라는 거지요.

제가 어제 공항에서 돌아오면서 제 아들하고 차 안에서 좀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는 전도를 어떻게 하느냐? 전도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전도를 해야한다" 하는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 내가 저 한 사람의 영혼을 두고 복음을 전하기를 원할 때, 나는 그 영혼이 구원받는 걸 얼마나 기뻐하겠느냐? 내가 한 영혼을 위해서 내가 피를 흘려죽을 수 있고 십자가에 못박힐 수 있느냐?

저는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적은 것도 내가 희생하지 않으려는 난데,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영혼이 구원받기를 기뻐하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기 때문에 주님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주신다고 하셨다면 아브라함이 늙은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아내가 경수가 끊어진게 무슨 소용이며, 단산된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시려고 하면.

그러니까 이제 우리 주님께서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를 들어쓰시는 걸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면 내가 믿음없는게 무슨 문제가 되고 말 못하는게 무슨 문제가 되며 전도 못하는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려고 나를 세우시고 저 영혼을 구원하시는 걸 기뻐하신다는 그런 마음의 믿음이 없으니까 주님이 일하실 거기에 기대를 안하고 내가 영혼을 구원하려고 하니 그때부터 부담스럽고 힘이 들고 어렵다는 거지요.

문제는,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뭐냐하면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걸 믿는 건데, 만일에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곧 나아서"하고 말씀이 있는데, "곧 나아서" 라고 하는 말씀은 이미 나았는데 이 병자가 느끼기엔 아직 병자 그대로 있을 때에 이 병자가 정말 말씀을 듣고 걸어갈 것이냐? 아니면 다 나은걸 보고 그때 걸어갈 것이냐? 이런 문제가 야기되는데, 다 나은 걸보고 걸어가려고 하면 자기 눈에 아직 아니기 때문에 걸어갈 수 없고 그냥 머물러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마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죄를 위하여 피흘려 죽은 걸 알면서도 내 자신을 바라보니까 난 여전히 죄인처럼 보여서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전혀 다름이 없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복음을 전할 때 내가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걸 보고 `하나님이 내 복음 전하는 일에 함께 하시는구나.` 그건 말이 안 되는게 내가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걸 보려면 믿음이 있어야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데, 믿음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걸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내가 무거운 짐을 지고 내가 복음을 전하고 내가 짐을 지고 있다는 거지요.

믿음이라는 건 열매가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내 형편과 상관없이 사랑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그래서 주님과 교제하고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다 보면 주의 마음을 느끼면서 `아 주님은 이걸 기뻐하시니까 주님은 이걸 이루신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처음에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믿음이 없을 때 자기 주인의 며느리를 구하는게 너무 부담스러웠는데, 아브라함의 말을 들으면서 믿음이 생기니까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주실줄 믿고 너무 평안한 마음으로 가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을 때, 이미 나은 건데, 하인들에게 "이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했을 때 이미 포도주로 변한 건데,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된 결과를 보고 믿으려고 하지, 말씀을 듣고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안 되고 만다는 거지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건 결과를 보고 믿는게 아닙니다. 결과가 보기에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곧 나아서" 그랬는데 낫긴 나았는데 열명의 문둥병자처럼 자기 느낌에 낫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가 있다는 거지요. 예수님 나를 깨끗케 했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죄가 남아있는 것처럼 보일수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내가 느끼는 느낌말고 내가 경험한 경험말고 내가 보아 확인된 것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나가는 그게 바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38년된 병자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정말 인간적으로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인데, 자기가 낫는 그 모양을 보고 걸은 것이 아니라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그것은 언제 이 38년된 병자가 나았겠습니까? 나은 뒤에 믿음입니까? 믿은 뒤에 나음입니까? 이미 우리 죄는 사해졌지만 믿었을 때 그게 내게 임하는 것처럼 나은 뒤에 믿는 건데, 실재로는 믿을 때 나음이 내게 임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나은 사실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도 자주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내가 볼때는 불가능한 일인데, 난 움직이질 못하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병든 사람 형편에 빠져있지 않고, 약한 형편에 젖어있지 아니하고, 부족하고 가난한 형편에 젖어있지 아니하고 자기와 상관없이 믿음을 가지고 발을 내닫고 그때 주의 능력이 나타나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주님이 38년된 병자에게 하신 것과 똑같은 말씀을 여러분에게 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내 있는 형편만 보고 불평하지 말고 주님을 보고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서 여러분의 삶이 바뀌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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