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보도된 뉴스를 알려드립니다

PRESS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면 삶이 기뻐지고 옛날의 더러운 삶이 싫어진다.
2002년 04월호
50만무팔린베스트셀러의주인공 기독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朴玉洙(박옥수˙58) 목사는 대전시 서구 도마동에 있는 한밭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일하며 기쁜소식선교회를 이끌고 있다. 이 선교회 안에는 전국의 300여 교회가 소속돼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고, 또 거기서 350여 명의 목사들이 일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남미를 비롯한 세계 40여 개국에 100여 명의 선교사들이 기쁜소식선교회의 이름으로 나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한다」는 목표로 선교활동을 펴고 있다. 朴목사는 열여덟 살 때 하느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이후 40년 간 교파를 초월해서 교회, 교도소, 군부대, 나환자촌을 돌며 새로운 복음을 전했다. 지난해 봄과 가을에는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수만 명을 모아놓고 열변을 토해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아르헨티나, 페루, 파라과이, 인도, 케냐 같은 나라에 초대받아 수많은 대중 앞에서 설교했다. 지금도 그는 미국 LA, 뉴욕, 앵커리지에서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와 나란히 같은 시간대에 또는 단독으로, TV와 라디오를 통해 설교방송을 하고 있다. 인터넷 방송을 통해 全세계에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동시에 그의 설교가 방송되고 있다. 1986년 10월에는 다른 교파인 남부산 교회의 초청을 받아 부산시민을 위한 부흥성회에 참석해서 5일 간 「말씀」을 전했는데, 그때 설교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은 50만 부가 팔렸다. 대전시 도마동에는 기쁜소식선교회와 한밭중앙교회가 나란히 서 있었다. 朴목사는 선교회 건물의 꼭대기 층인 7층에 살고 있었다. 목사 사택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어서, 이 선교회 소속 교회의 목사들은 다들 이렇게 교회에 방 한 칸을 내서 산다고 했다. 朴목사는 30평쯤 되는 넓은 마루방에 앉아 있다가 나를 맞았다. 작달막한 키, 웃는 얼굴, 나이보다 더 희게 센 머리, 그를 보자 언뜻 키 작은 사람이 큰 일을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기독교는 기뻐하는 종교다』 - 목사님은 한국의 기성교회가 잘못 가고 있다고 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지금 뭘 잘못하고 있나요? 『「예수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천국 간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다 믿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를 믿어서 죄 사함 받고 밝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대부분이 교회 나가면서도 죄 때문에 울고불고 고통스러워합니다.』 -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죄를 사함 받았으면 행복해져야 할 텐데요. 그렇지요. 교회를 다니지만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찬송가에「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하는 것도 있고,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하는 것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기뻐하는 좋은 종교인데, 울며 고통스러워하는 종교가 됐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말은 한 마디로 「죄를 사함 받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세상살이가 다 기뻐진다는 것이었다. 이 話頭를 가지고 그는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죄를 사함 받습니까? 『죄 사함은 이론이 아닌 마음으로 받는 겁니다. 죄 사함을 받기 전에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냥 들어와요. 성경을 읽으면 사람들이 두 가지 부류로 나뉘지요. ① 어떤 사람들은 「아, 십계명을 지켜야지」합니다.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자신만만한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십계명을 지키고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잘 내고, 이렇게 뭘 지키려고 하는 데만 마음이 빠져요. ② 그런데 스스로 자기가 진짜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건 난 못 하겠다. 이건 하나님의 차원에서 하는 일인데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 나는 못한다」하면서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를 때려서 거반 죽이고 갔습니다. 제사장이 그를 보고 피해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서 이 사람은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와서 구원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은혜 입은 사람들을 보면, 간음하다 잡혀 돌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여자, 38년 된 병자, 이렇게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두 손으로 예수님을 힘있게 붙듭니다. 그런 상태에 도달했을 때 예수님의 진리가 들어가지요』 朴목사의 말을 듣다 보니 슬그머니 걱정이 됐다. -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참 큰일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절박한 상황이어서 아무것도 붙들 수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한테 구원을 쉽게 받을 수 있겠지만, 세속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자기 힘으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잘사는 사람들도 자기 본 마음을 가지면 「이건 내 힘으로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하나님, 나는 정말 부끄러운 인간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하는 상태가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됐을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게 되지요』 -예수님이 들어와 있는 것을 어떻게 확인합니까? 『그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주 무익하고 어찌 할 수가 없는 인간이라는 걸 깨달으면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그 다음에 성경을 읽어 보면 뭐가 보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해결해 주신 경로가 그때 들어옵니다』 -마음으로 깨닫는 거지요? 『예, 「이제 내가 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들어옵니다』 『삶이 기뻐지고 옛날의 더러운 삶이 싫어진다』 그렇다면 또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목사님은 기도하실 때나 평소에 죄인이란 생각을 안 하세요? 『저는 정말 악하고 더러운 인간이었는데 예수님의 피로 제 죄가 깨끗하게 씻어 졌습니다. 그래서「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씻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교회의 교인들은 죄 사함을 다 받았습니까? 『처음 온 몇몇 분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속세적 표현으로 어떻게 달라집니까? 늘 기쁩니까?아니면 건강해집니까? 『삶이 기뻐지고 옛날의 추하고 더러운 삶이 싫어집니다. 성경은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는데 살다 보면 도둑질을 안 하게 됩니까? 하지요. 그런데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면 그런 게 싫어져요.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한번 받아들이면 내 뜻대로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살게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 선교회에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선교하는 선교사가 있는데 주로 마약환자들을 대상으로 선교합니다. 그 사람들이 저희들 교회에 와서 다 마약을 끊었어요. 그리고 마피아들이 변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교도소에 다니면서 살인범 같은 사형수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이 말씀이 들어가면 그들이 다 변해요』 -여기 100만원짜리 카메라가 있고 10만원짜리 카메라가 있다고 할 때, 죄 사함을 받은 이 교회신도들은 어느 걸 집겠습니까? 『그거야 100만원짜리를 집겠지요』 우리는 껄껄 웃었다. 『우리는 마음속에 탐욕을 가진 인간입니다. 여자를 보면 음욕을 품는 인간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라는 겁니다』 -목사님 봉급은 얼마나 받습니까? 『사실 목사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미국엘 가도 공항에서 내리면 픽업해 주고 잠자리도 다 마련해 줍니다. 외식을 해도 목사가 돈 내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래서 10달러도 안 쓰고 옵니다. 제가 지금 개인적으로 쓰는 돈은 이발비, 목욕비, 고속도로에서 음료수 사먹는 거, 그거 외에는 없어요. 그러다 보니 한 달에 한 40만원 받는데 그것도 남습니다』 -다른 목사님들도 40만원밖에 안 받습니까? 『제가 많이 받는 편일 겁니다. 30만원 받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옷 한 벌에 30만원이 넘는데, 목사님들 옷은 무슨 돈으로 사서 입나요? 『제가 쓴「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란 책이 50만 부 가량 나갔거든요. 책 한 부 인세가 1000원이라고 해도 5억이 돼요. 그런데 제가 그 돈을 10원도 받지 않았습니다. 다 교회에서 쓰도록 했습니다. 내가 목사고 우리 교회에서 생활비를 주는데 적든 많든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저는 저희가 어떻게 사는지 모릅니다. 성도들이 쌀도 가져 오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필요한 것들을 가져옵니다』 -朴목사님은 신도들이 뭘 갖다 주겠지만 다른 목사님들은 제가 생각하기에 답답할 것 같은데요? 『대부분 부족함 없이 살아요. 우리 교회 성도들은 참 잘합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살아요. 시골에 성도가 10명이나 20명쯤 되는 교회의 전도사님들한테는 저희들 교회에서 조금씩 돕습니다』 40個國서 선교사 100명 활동 -선교회의 활동이 참 많은 것 같은데, 그 큰 살림을 어떻게 합니까? 『저희 교회 성도들은 헌금을 많이 합니다. 복음을 위해 돈 쓸 일들이 참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케냐 나이로비에 있는 선교회에서 쓸 敷地(부지) 도 사야 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선교회에서도 세들어 있기가 뭐해서 이번에 집을 샀습니다. 이렇게 돈 쓸 일이 생기면 헌금을 받는데 우리는 누가 얼마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나오는 액수를 보면 다른 교회보다 훨씬 많아요. 저희 교회는 헌금 시간도 따로 없습니다. 출입문 옆 구석에 헌금 상자를 놓아두면 성도들이 알아서 아무때나 헌금을 합니다. 또 누가 얼마를 했다고 광고하는 일도 없습니다』 -이 교회(한밭중앙교회) 신도가 500명정도라고 들었는데, 교회의 신도가 數萬 또는 數十萬으로 대형화되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성도들과 접할 시간이 적어질 테니까 그것이 참 안타까워요』 여기서 아픈 곳을 찔러 본다. -목사님도 세계 40국에 100여 명의 선교사를 보내시고 많은 돈을 그쪽에 쓰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대형화시키는 것과 진배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선교회를 키우려는 게 아니라 어려운 나라에 복음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어려운 국가를 도우려는 것이지요』 -많은 유럽의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진출할 때, 선교사들한테는 성경이 있었고 아프리카 사람들한테는 땅이 있었는데 그게 몇십 년 지나고 나니까 아프리카 원주민들한테는 성경이 들려져 있고 유럽 사람들한테는 땅이 와 있었다고 해요. 결국 선교사업에 열중하다 보면 이 교회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어느 정도의 땅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예배당을 지을 만한 땅, 선교센터를 위한 사무실이나 학교 같은 건물을 지을 땅 정도는 필요합니다. 우리가 땅을 가지고 치부할 마음은 없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TV나 잡지를 통해 가끔 봤습니다. 대체로 선교사들이 거기 가서 현지인들한테 약 품도 주고 에이즈 퇴치도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그것이 제게는 우리나 라가 못살 때 미국 사람들이 구호물자 갖다 주면서 우리를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하던 그 마음하고 같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이 외국을 많이 돕고 있습니다만 아주 신중하게 하고 있습니다. 돈이 먼저 들어가면 선교는 끝납니다. 복음이 들어가서 복음의 밑받침 위에 돈이 필요하면 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맛을 보기 전에 돈 맛을 보면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어요』 -제가 朴목사님을 보면서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앞으로 교단이 커지면 아방궁 같은 집을 짓고, 목사님 얼굴 보기 어렵게 되고, 목사님들 치부하고, 여기저기 공장도 사고, 신도들도 떵떵거리고, 이러면 또 하나의 타락한 교회가 될 것 아닙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충분합니다. 저는 저하고 복음 일을 같이 했던 사람들 가운데도 삐뚤게 나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저도 저를 못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저를 주님이 지켜 주셨어요. 저희도 급작스런 부흥을 자제해요』 -교회사를 보면, 천주교가 썩었다고 해서 개신교가 나왔고, 또 개신교가 싫다고 다른 교파들이 나왔는데, 오늘날 와서는 가장 썩었다고 하는 천주교가 가장 건실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 걸 보면 새로운 이론을 들고 뛰쳐나오는 게 能事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吳선생님은 사회적 · 도덕적인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볼 겁니다. 저는 주님의 기준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하고 마음을 같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하고 마음이 통하니까요. 예를 들어서 어떤 단체가 커다란 善을 행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 작은 善이라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나병환자와 함께 자고 먹었다』 -커다란 의미로 볼 때는 인간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것이 종교의 궁극적 목표지요. 인간 생활과 유리된 것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지요. 종교가 뭐가 좋겠습니까? 천주교를 보면, 이른바「복음전파」에만 매달리지 않고, 이 땅에 민주주의 가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바른말을 할 줄도 알고, 잡혀가서 투옥할 줄도 알았지요. 또 낮은 백성들이 병들고 굶주릴 때 도와 주고 치료해 줄 줄도 알았잖아요? 『저의 경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나환자촌에 들어갈 때 어떤 목사님이 농담으로 거기 가면 나환자들이 달걀을 고름 묻은 손으로 까서 먹으라고 준다고 하더라구요. 고름 묻은 손으로 시험해 본다는 겁니다. 먹겠느냐, 안 먹겠느냐?』 - 겁나네! 『그래서 제가 「뭘 쓸데없는 소릴 하느냐? 그런 일이 있겠느냐?」하고 넘겼는데, 혼자 조용히 앉아서 생각하니, 「그러면 너는 그런 고름 묻은 달걀 먹을 수 있는가?」하는 질문이 떠올라요. 그런데 대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나환자촌 교회 가서 한 주간 집회를 해야 하는데 갈까 말까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 어딘데요? 『전에 제가 대구 살 때 영천 나환자촌에 서광교회라고 이일향 목사님이 계신 교회였는데, 그 목사님이 저한테 와서 집회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면서「어느 목사님이 오시려고 했다가 일주일 앞두고 바빠 못 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환자라서 안 오는 줄 알고 다들 실망을 했다. 그래서 꼭 와야 한다」하는 이야기를 하고 가셨어요. 3일쯤 앞두고 새벽에, 세 시쯤에 일어나서 예배당에서 기도를 했어요. 제가 나환자촌에 가는 부분을 두고 기도하는데, 제 마음에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같은 귀하신 분도 문둥이 집에 들어가셨는데, 나 같은 인간이 왜 이걸 주저하나?」그 다음에 또 하나님이 제 마음에 주신 게 있었습니다. 「나환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너도 문둥병균에 감염되면 나환자야」 그 마음이 들면서「아, 그렇구나!」하고 깜짝 놀랐어요. 그날 주님께서 내 마음에 「문둥이를 끌어안고 입을 맞춰도 괜찮겠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곳에 가서 집회를 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나환자하고 친구가 됐어요』 - 정말 달걀을 주던가요? 『그렇지 않았어요』 - 다행일세! 『제가 그 사람들의 친구가 됐어요. 한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자고 같 이 먹었습니다. 나중에 그분들이 우리 집에 오면 저하고 같이 자고 먹었습니다』 - 고름이 나오는 분들입니까? 『고름 나오는 사람도 있고 안 나오는 사람도 있는데, 그 목사님(이일향 목사)이 나환자거든요. 그분과 함께 목욕도 했습니다. 한번은 함께 목욕을 하다가 제가 메리야스하고 팬티를 빨게 됐어요. 그래서 그 목사님 것도 제 것과 같이 빨아 줬더니 목사님이 울면서 「朴목사님,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 대접을 처음으로 받았습니다」하고 감격하더라고요. 전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런 마음은 朴玉洙 목사의 마음이 아니예요. 마음 안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어떤 도덕 기준이나 인간의 의지로 사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뜻으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도 그분들(나병환자들)은 나중에 이러는 겁니다. 「朴목사님 솔직히 이야기하세요. 괜찮습니다」「뭘?」「朴목사님도 M.D.(문둥이) 맞지요?」 내가 스스럼없이 덤비니까 같은 병을 앓고있는 줄 알았던 거지요. 그래서 제가 「문둥병은 잠복기간이 3년이라며? 나 몰라. 3년 지나보고 대답해 줄게. 그런데 지금은 아직 아니야」하고 대답했어요』 열여덟 살 때 하나님께 몸 바쳐 - 목사님 자신은 언제 하나님으로 부터 죄사함을 받으셨습니까? 『제가 열여덟 살 때입니다. 저는 교회를 어렸을 때부터 다녔습니다. 늘 죄를 고백하고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서 기술학교를 다니다가 제가 문제를 좀 일으켜 가지고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어요. 학교 졸업도 못 하고 내려오니까 너무 따분하고, 또 내 자신이 초라했어요. 그런데다가 죄를 씻음 받아야 한다는 억압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늘 새벽마다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울며 기도하곤 했어요. 그래가지고도 안 돼서 목사님을 찾아갔어요.「목사님, 제가 이런 나쁜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죄를 씻고 믿음을 갖겠습니까?」하니까, 목사님이 대답하셨습니다. 「朴선생, 젊을 땐 다 그런 거야. 나도 딸 둘을 객지에서 공부시키고 있지만, 그놈들이 무슨 짓 하는지 몰라. 그러니까 지금부터 믿음 잘 가지고 시험을 이겨 나가면 복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내 마음에는 해결이 안 됐어요. 그래서 「교회 나가지 말자. 교회 나가서 뭣 하냐? 난 택한 백성이 아닌가 봐. 나는 예수님하고 안 맞는 사람인가 봐」하며 교회에 안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러나 주일에 시골에서 교회 종소리를 들으니까 안 나갈 수가 없겠더라구요. 그런 갈등 속에서 일년 가까이를 지냈어요. 1962년도인데, 그 해 어느날 새벽에 교회에 가서 전처럼 「하나님, 내가 이런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요」하고, 막 울면서 기도를 했어요. 그날 기도를 마쳤는데 내 마음에 죄가 다 사해졌다는 마음이 들어왔어요. 마음이 평안해지더라고요. 너무너무 신기한 것은 그때부터 성경을 막 읽게 되는 거예요. 전엔 성경을 읽으려고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됐는데, 이젠 성경이 막 읽혔어요. 그리고 성경말씀이 전혀 다른 눈으로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내 죄를 씻으셨구나. 참 감사하다」그런 마음이 들면서 내 마음이 달라지는 거예요』 『하나님, 가진 게 몸밖에 없는데, 나 같은 인간 어디다 쓰겠습니까? 아무 쓸모없는 인간인데 드릴 게 없어 이거라도 드립니다』 여기서 그에게 轉機가 왔다. 『한 달쯤 지난 후에 「내가 이렇게 맘이 변했는데, 이런 은혜를 받았는데!」하는 마음이 일어나면서 하나님께 뭘 좀 드리고 싶더라구요. 연보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시골에서 부모가 용돈을 줍니까? 돈이 있어야지요. 전에는 돈이 없으면 아버지 몰래 볏가마니를 꺼내다가 친구들하고 팔아 가지고 용돈을 마련하고 했지만』 -훔쳐서라도 하느님께 좀 드리지요. 『하나님 앞에 드리는 돈은 그런 식으로는 못 하겠더라구요. 그래서 어느 날 교회에 가서 무릎 꿇고 기도했어요. 「하나님, 너무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드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가진 게 몸밖에 없는데, 나 같은 인간 어디다 쓰겠습니까? 아무 쓸모없는 인간인데 드릴 게 없어 이거라도 드립니다. 당신이 받으신다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된다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그냥 시골 교회에 가서 아이들 신발이나 정리해 주고, 코나 닦아 주며 살고 싶었습니다. 또 농촌에 남자 없이 여자만 사는 집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 집에 가서 담이 무너져 있는 것이나 쌓아 주고 그러면서 한평생을 살아도 행복할 거 같은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런 마음으로 기도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제게 은혜를 베푸셔서 제 길을 열어 주시더라구요. 한 달쯤 지난 뒤에 선교학교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외국에서 온 선교사 중에 진짜 거듭난 선교사들이 있었지요. 그분들이 와서 보니까 한국 교회가 너무 형식적인 종교로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야, 이거 한국 교회가 큰일이다. 거듭난 하나님의 종들을 키우는 학교를 시작하자」하고 7∼8명이 모여서 선교학교를 시작했어요. 그때 제가 거기가서 교육을 받게 된 거죠』 고달팠던 배달소년 시절 朴玉洙 목사는 1944년 6월2일(陰), 경북 구미시(선산읍 이문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朴在得(1975년 작고)씨의 3남 2녀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타계했지만, 아버지는 자식들 고생시킨다고 새어머니를 얻지 않고 독신으로 자식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고향에서 선산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서울로 가 삼각지에 있었던 국립기술학교를 다녔다. 기술학교에 다니면서도 형편이 어려워 어떤 신문 광희지국에서 신문배달을 해야 했다. 그때도 문제가 많았다. 『처음에 300부를 인계받았는데, 지국 사람들이 참 나빴어요. 신문배달원들 피를 빨아먹더라구요. 신문 값을 받아서 지국에 돈을 내고 나머지 쪼끔을 제가 받아쓰는 겁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신문 300부를 돌리고 수금하러 다니니까 돈을 안 주면서, 누가 신문을 넣으라고 했느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제대로 신문 값 내는 데는 250부도 안됐는데 300부로 인계받은 거죠. 처음에 들어갈 때 보증금으로 그때 돈 1만원쯤을 냈는데, 총무가 3개월 안에 그만두면 그걸 돌려받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각서를 쓰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썼습니다. 그런데 일을 해보니까 한 달 죽어라고 신문 돌려도 내 손엔 돈이 하나도 안 들어와요』 그래서 그는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돌리고 남은 50부를 들고 다니면서 가판을 했는데 그렇게 해도 손해였어요. 거기서 화가 나더라구요. 「아, 이놈들! 도둑놈들이구나!」 나도 그냥 이렇게 있을 수 없다 싶어서 신문 값을 받아 가지고 지국에 주지 않고 도망치려고 했지요』 - 그때 하나님이 칭찬하셨겠네요? 『그때는 제가 구원받기 전이었습니다. 배달을 해 보니 신문 값을 잘 주는 집이 있더라고요. 그런 집들은 안 받고 놔뒀다가 잘 안 주는 집들부터 받았어요. 마지막 날 받아서 도망을 치려고 했던 거지요. 그렇게 했는데도 내가 낸 보증금만큼도 안 됐어요』 - 그래 성공을 했습니까? 『총무한테 들켰어요. 그래서 고향으로 도망 온 겁니다. 학교도 그만두고. 그 학교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학교여서 정착금까지 주었어요. 제가 졸업을 해서 그 정착금을 받아야 했지요. 그런데 서울 가면 잡힐까 봐 못 갔어요. 학교서 편지가 많이 왔어요. 빨리 오라고, 신문 값 떼어먹은 게 1만원도 안 됐는데 그때 정부에서 주는 돈이 10만원쯤 됐어요.』 - 무슨 기술 배웠는데요? 『목공이었습니다.』 - 아, 지금도 목공일 잘 하시겠네. 예수님도 목수였잖아요? 그는 신문 값 1만원을 떼어먹는 바람에 목공이 되는 길을 버렸다. 그 대신 그는 가장 거룩한 목수의 조수가 됐다. 그는 또 다른 목수의 길을 걷기 위해 대구에 있던 선교학교에 입학한다. -선교학교에 들어가셔선 마음이 좋으시던가요? 『참 좋았습니다.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해도 거듭나지 않은 목사님들이 하는 설교와는 달랐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분들은 전부 이론과 지식으로 설교를 했지만, 거듭난 분들은 마음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 선교사님들은 돈을 가지고 온 게 아니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선교사님들이었지만 다들 어렵게 사시며 같이 굶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에게 첫째 믿음에 관한 사실들을 훈련시켰습니다.「생활에서 물질문제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해결하라. 돈이 없을때는 남들에게 없다고 구하지도 말고 암시도 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너희들이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걸 들어주실 것이다.」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어요.』 -먹을게 없으면 차라리 나와서 땅을 파야지요. 『다른 방법이 없어서 기도만 했는데, 참 많이 굶었습니다.』 『牧師는 자격증으로 되는게 아니다.』 그는 선교학교를 마친 후에 경남 합천 압곡동이라는 산골에 들어가서 전도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고, 그 다음에 거창 장팔리라는 곳에 가서 전도사로 일했다. 『저는 두 차례 훈련을 받았습니다. 1962년부터 처음 훈련을 받았고, 나중에 다시 훈련을 받았어요. 저희 선교회에서는 선교학교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목사나 전도사라고 하지 않고 그냥 전도자로 세웁니다. 얼마 있다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나타나면 목사로 안수합니다. 저 사람 속에 정말 하나님이 함께한다, 저 사람은 하나님에게 이끌림을 받는다, 이런 사실이 분명히 보일 때 목사 안수를 해요. 목사는 자격증을 딴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 목사가 돼야지,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사람이 논문 잘 써가지고 목사가 되면 안 되잖아요? 지식이 아닌 신앙을 키워야지요. 오늘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문제지요. 목사가 거듭나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서도 시험 쳐서 합격되면 얼마든지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거지요.』 -물론 다 하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겠지요. 예를 들면, 의과대학을 나온다고 전부 名醫가 되진 않겠지만, 의과대학이라는 형식적인 제도가 있어서 거기 나온 사람들은 十中七八은 의사로서 제 몫을 하고, 그 중에 아주 드물게 명의가 나오겠지요. 그래서 형식적인 절차와 규정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희들도 선교학교에 와서 신앙을 하고 공부를 하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는 1964년에 경남 거창읍 장팔리로 가서 1년 반동안 전도사로 일하다가 1965년 10월 30일 軍에 입대한다. 軍에 가서도 그는 그가 할 일을 계속했다. 1군 사령부직할통신대에서 근무하면서 사병으로 예배를 인도했고, 후엔 그 부대에 교회까지 지어놓고 나왔다. 그는 1968년 6월 8일 제대하고 경북김천으로 와서 다시 복음 전도를 시 작했다. 거기서 그는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칠 전도자를 뽑아 가르쳐서 각 교회로 보냈다. 그러나 돈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는 날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1971년 지금의 부인인 金明淳(60)씨를 만나 결혼했다. 그보다 2년 年上이었다. 존 앤더슨이란 선교사가 소개해서 처음 알게 됐는데 처음엔 그가 하는 일을 돕다가 가까워져서 결혼까지 하게 됐다고 한다. -부인을 굶기시진 않으셨어요? 『옛날에 저희들이 김천에 있을 때 양식이 떨어질 때가 자주 있었어요. 이상한 일이지요. 꼭 양식이 떨어질 때면 손님이 오는 겁니다. 제일 어려울 때가 그런 때지요. 그런데 손님이 오면 또 없던 양식이 들어와요. 손님이 사가지고 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예요. 그래서, 양식이 떨어지면 오늘 손님 안오나 하고 기다리게 됩니다. 손님이 와서 우리집에 있는 양식을 먹고 간다는 생각이 드는게 아니고, 손님 덕에 우리가 양식을 잘 먹는다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풀뿌리 캐먹으며 열흘 간 굶기도 -앉아서 굶지 말고 나가서 돈을 좀 벌지 그러셨어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김천서 도배를 하기도 했어요. 한번은 지물포 아줌마한테 전도하러 가니까 그 아줌마가 하나님 말씀은 안 듣고 「도배 잘하는 사람 없느냐」고 찾더라구요.「아, 도배라면 우리가 잘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가 도배를 하게 됐습니다. 그때 우리가 며칠 굶은 터였어.』 -아니, 굶고 전도를 나갔단 말입니까? 『굶어도 전도하면 힘이 나니까 전도하러 가야지요. 압곡동 있을 때는 참 많이 굶었어요. 밥 먹어본지가 언젠가 하고 계산해 보니까 열흘이나 된 적도 있었어요. 열흘 만에 밥을 먹은 거지요』 -그럼 뭘 먹고 살았어요? 풀뿌리를 먹었어요? 『배가 부를 때는 산에 가면 먹을게 아무 것도 없지만, 배가 고플 때 산에 가면 돌하고 흙, 나무 빼고는 다 먹을 수 있어요 정말 그래요, 뭐든지 먹을 수가 있어요.』 -하나님을 안 믿고 바위덩어리를 믿어도 목사님처럼 열심히 믿으면 복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도배해서 돈 좀 벌었습니까? 『주인이 2500원을 주더라구요. 어떤 형제하고 저하고 둘이 사흘 일을 했는데, 2500원을 받으니까 얼마나 부자 같았던지! 일해서 돈 받기는 생전 처음이었어요. 그게 큰돈이었어요. 그때 그걸로 우리가 먹고싶었던 고구마도 사고, 쌀도 사고, 고등어도 한 마리 샀어요. 「야, 됐다. 이제 우리 도배해서 먹고 살면서 전도하면 되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지요. 그래서 당장 지물포 주인 아줌마한테 혹시 우리 찾는 전화 오거든 연락해 달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랬더니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아주 기분이 좋아서 도배를 하러 가려는데, 아 글쎄 「말씀」을 들으러 어떤 사람이 온 것입니다. 자, 이거 도배를 하러 가야하느냐, 전도를 하러 가야 하느냐?』 -하나님이 시험하시네! 『전도는 다음에 해도 되잖아요. 그러니 빨리 도배하고 와서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 제 마음에 하나 찌르고 들어오는게 있었어요. 「너 여기 도배하러 왔나, 전도하러 왔나?」 그 생각이 드니까 도배하러 못 가겠더라구요. 결국 그 사람에게 저녁 늦게 까지 복음을 전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또 도배하러 가려고 할 때마다 그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미련해도 「하나님이 내가 도배하는 걸 기뻐하시지 않는구나.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만 하라고 하시는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저는 제 생업을 위해서는 전혀 일을 안했어요』 방송설교로 인기 모아 -목사님은 누구랑 싸워본 적 있습니까? 『저 많이 싸웁니다. 저는 싸움꾼입니다. 제 아내하고도 싸우고 제 자신하고도 싸우고, 우리 교회 성도들하고도 싸웁니다 믿음이 아닌 부분을 지적해서 깨우치면 사람들이 잘 안 받지요. 그러면 또 싸우게 됩니다.』 그는 딸(30)과 아들(28)을 하나씩 두었다. 딸은 결혼해서 부모 근처에 살고 있고, 아들은 해외에 선교사로 나가려고 지금 선교회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그는 1971년에 딕 선교사로부터 목사를 안수 받았다. 그는 2년 뒤인 1973년에 대구로 내려가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1976년에는 기쁜소식선교회의 前身인 한국복음선교학교를 설립했다. 이 선교학교가 오늘날 아주 크게 자란 기쁜소식선교회의 씨앗이 됐다. 그리고 대한예수교침례회의 토대가 됐다. 『제가 선교학교를 시작하면서 전도자들이 많이 나오게 됐습니다. 전도자들이 여러 곳으로 퍼져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났습니다. 서울에도 교회가 생기고 전국 여러 곳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대구에서는 1973년에서 1984년까지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저는 대구 중앙교회에 담임목사로 일했습니다. 1984년만 해도 저희 교회에 목회자들이 50명쯤밖에 안됐지요. 지금은 350명쯤 됩니다. 저는 1984년에 서울로 갔습니다.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서울제일교회 가서 사역했습니다.』 -기쁜소식선교회는 어떻게 만들어 졌습니까? 『서울에 있을 때에 제가 아세아 방송에서 방송설교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15분 짜리를 3개월쯤 방송했어요. 그런데 호응도를 편지로 조사하더라구 요. 제가 방송을 하면서 저한테 오는 편지가 제일 많았어요. 방송국에 제 설교 테이프를 신청하시는 분이 많아서 저 때문에 설교내용을 녹음해서 보내는 課까지 생겼다구요. 한 석 달 쯤 지난 뒤에 방송국 측에서 시간을 바꾸자고 했습니다. 아예「 기쁜 소식」시간을 새로 편성해서 하자고 했어요. 그 당시에 아세아 방송국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세아 방송입니다」고까지 했어요. 그러니까 「기쁜 소식」이 제일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거기서「기쁜소식」이란 이름을 따온 겁니다. 일 주일에 제 시간이 두 번 있었는데 15분 짜리와 30분짜리였지요. 15분 짜리는 조용기 목사님이 맡고, 30분 짜리는 제가 맡았습니다. 그때가 1985년이었습니다』 趙鏞基 목사와 미국에서 TV설교 - 대전은 어떻게 택하셨어요? 『선교학교가 커지면서 서울이 좀 복잡했어요. 그래서 대전이 땅도 넓고 同役者들도 대전에서 일하는게 좋다고 해서 1990년에 대전으로 내려왔습니다』 기쁜소식선교회 건물 지하에는 인터넷 방송국이 차려져 있다. 세계 40여 개국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도 이 방송을 보며본부와 의사소통을 한다. 『매주 토요일 저녁 10시부터 11시까지 한 시간동안 「박옥수 목사와의 영상교제」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합니다. 우리 선교회의 관한 소식도 전하고 다른 상황도 인터넷 방송으로 전합니다. 그리고 주일 낮 저희 교회 예배가 생중계로 나갑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대형화면으로 이 모습을 틀어놓고 예배를 보기도 하지요. 주일에 바쁜 분들은 뒤에 다운 받아가지고 예배를 볼 수 있게도 합니다. 그 외에 다른 목사님들의 좋은 설교 말씀, 수양회 때 전한 말씀, 우리가 잠실학생체육관 집회에서 했던 것 같은 것을 방송국에서 보내줍니다. 하루에 여덟 시간정도 방송합니다.』 -미국에서 TV로도 목사님이 설교방송을 하고 계신다죠. 『LA와 뉴욕의 한인방송(TV)에서 제 설교가 방송되고 있습니다. LA에서는 저녁 8시부터 8시 반까지 趙鏞基 목사님이 하시고, 다음부터는 9시까지는 제 시간입니다. 뉴욕에서는 제가 혼자 하고 있습니다. 앵커리지에서도 하고 있지요. 南美에서는 라디오로 방송하고 있습니다.』 그는 케냐를 아프리카 선교를 거점으로 삼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1993년 대전 엑스포 때 우리 교회 형제들이 메일 케냐 숙소에 가서 이야기하면서 친구가 됐는데, 하루는 저한테 와서 「목사님, 케냐 사람들이 참 불쌍해요」하는 겁니다. 한국 음식 값이 비싸니까 밥을 못 먹는대요. 그래서 고구마나 라면만 먹고 산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케냐 직원들 20명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했어요. 그 사람들이 너무 고마워하면서 선물로 아프리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날 헤어질 때, 여기 한국에 와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니까, 한국여행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제가 지방 교회에 갈 때에 제 승용차 뒤에 두세 명은 태울 수 있으니, 그때에 같이 가자니까 이분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이 근무 조를 짜서 교대로 함께 여행을 했습니다. 며칠 후, 엑스포 행사 중 「케냐의 날」이 있어서 케냐 상 공부 장관이 왔어요. 그분들이 케냐 상공부 장관한테 「 우리 케냐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朴목사는 우리 민족을 너무 사랑한다」고 했대요. 장관이 그 말을 듣고 저한테 전화를 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 장관과 수행원 20여명을 식사에 초대했어요. 그러면서 그때 그 장관하고 저하고 친구가 된 겁니다. 다음해(1994년)에 그 분이 저를 초청했어요. 그때 케냐 나이로비 대운동자에서 「무브 온(Move on)」이라는 큰 집회가 열렸는데 제가 거기서 두 시간 동안 설교를 했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선교사들을 케냐로 보내게 된 겁니다. 그리고 나서 우간다,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南아프리카공화국, 가나, 나이지리아, 베넹, 토고, 코트디부아르에 계속 선교사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남미는 어디 어디에 가 있습니까?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브라질의 상파울루와 브라질리아, 파라과이의 아순시온, 페루의 리마, 콜롬비아, 볼리비아, 우루과이에 교회들이 있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세상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 믿으면 정말 너무 좋고 행복한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껍데기로 믿으며 죄인이라고 울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지금 잘못 생각하시는데,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다 들어오셔서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 같으면 세상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악한 자도 좀 있고 도둑도 좀 있어야지요.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면 진짜 재미있지요!』 그는 절대로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 원문보기

(0KB) [1434] DATE : 2007-08-23 22:08:08


Reply 윗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3개월이 지난 글은 덧글 입력이 불가 합니다.
카카오톡 공유하기 URL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