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쁜소식선교회의 형성 과정 - Part 1



1) 한국의 첫 웩 선교회 선교사, 케이스 글라스

한국 교회의 실상을 직접 보면서 받은 충격은 놀만 그랍 회장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을 다녀간 이후 그는 한국을 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열심히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면서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인들의 모습이 그의 눈 앞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의 한 교회에서 놀만 그랍 회장을 강사로 초청했다. 놀만 그랍 회장은 평상시처럼 웩 선교회에서 훈련 중인 선교학생들(웩 선교회는 영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자원하는 선교사들을 모집하여 2년 정도 훈련한 후 세계 곳곳으로 파송했다.)을 데리고 가서 말씀을 전하기 전 간증을 시켰다. 그날 저녁 한 선교학생이 나와 자기의 구원 간증을 했다.


"저는 네덜란드에서 개혁 교회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열심을 냈지만, 자라면서 짓는 죄 때문에 고민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제게 거듭난 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은 미션 스쿨 교장으로 제게 복음을 전해주셨는데, 그때 제 모든 죄를 해결 받고 저도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제 마음에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웩 선교회에 선교 지망을 했고, 지금은 네팔에 선교를 떠나기 위해 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케이스 글라스(Kays Glass, 한국명 길기수)였다. (당시 그의 친구로, 후에 '복음은 철의 장막을 뚫고' 라는 책의 저자이며, 공산화된 동유럽에 1955년부터 선교를 시작하여 '복음의 밀수꾼'으로 유명한 브라더 앤드류도 그와 함께 웩 선교회에서 훈련을 받았다.) 케이스 글라스의 간증은,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간절하던 놀만 그랍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복음 없는 교회에서 고통스럽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구원 받은 그야 말로 종교적 열심에만 빠진 한국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합당한 사람이라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래서 간증이 끝난 후 강단에 서자마자 놀만 그랍 회장은 "지금 간증한 학생은 네팔이 아닌 한국으로 갈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때 케이스 글라스 학생은 물론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얼마 후 네팔 정부는 공산주의를 채택한 이유로 케이스 글라스의 비자를 거부했고, 그 후 한국을 향한 놀만 그랍의 마음을 받은 케이스 글라스 학생은 한국의 첫 웩 선교사로 1956년에 한국에 발을 내딛게 된다.



2) 케이스 글라스 선교사와 소년 박옥수와의 만남

"자신도 구원 받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전도할 수 있습니까?"(케이스 글라스)


케이스 글라스 선교사(1956년~1975년 한국 선교)를 통해 웩 선교회가 처음으로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한 가지 주목해야 될 부분이 있다. 웩 선교회는 통상 선교지의 대표적인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 사역을 하는데, 하나님은 케이스 글라스 선교사를 한국의 소도시인 경북 선산의 한 작은 교회로 이끄신 것이다. 그 교회가 바로 선산장로교회로 박옥수 목사가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이다. 박옥수 목사는 1944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하여 처녀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그 교회를 다녔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한국 교인들이 그러했듯이 막연히 하나님을 찾으며 교회에만 열심히 나가는 정도였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사로잡혀 있던 박옥수 소년(당시 중학생)과, 한국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놀만 그랍 회장의 소원을 따라 파송된 케이스 글라스 선교사와의 만남을 허락하셨다.


케이스 글라스 선교사는 선산장로교회에서의 사역과 함께 학교에서 영어도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박옥수 소년과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 박옥수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은 케이스 글라스 선교사가 전도를 앞두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서로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선교사님, 내일 시장에 전도하러 갈 때 저도 따라가도 됩니까?"
"당신, 구원 받았습니까?"
"예? ... 구원이라고요? ... "
"자신도 구원 받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전도할 수 있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 교회에서는 그렇게 개인적이고 직접적으로 구원에 대해 묻거나 대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냥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이고 구원 받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케이스 글라스 선교사의 구원 여부에 대한 질문은 굉장히 도전적이고 생소한 것이었기에 소년 박옥수의 마음에 깊이 박혔고, 그로 하여금 진지하게 자신의 구원 문제를 돌아볼 수 있도록 결정적인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그 후 박옥수 목사는 청년 시절을 거치면서 더욱 죄와 구원에 대해 갈등하고 고통하던 중 그의 나이 19세인 1962년 10월 7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모든 죄를 씻음 받고 거듭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3) 1962년 처음 설립된, 거듭난 선교사들의 선교학교

"하나님, 한국을 위해 거듭난 현지 전도자가 꼭 필요합니다. 그들을 위한 선교학교를 도우소서."


1962년 말의 어느 날,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 위치한 내인병원 2층 집에서 케이스 글라스, 데릭 얼(Derek Earl, 한국명 원대역), 딕 욕(Dick York), 말론 베이커(Marlin Baker), 해리 와이먼(Harry Wyman) 등 거듭난 선교사들이 1주일 동안 금식 기도회를 가졌다. 그 집은 놀만 그랍 회장이 두번째로 한국에 파송한 웩 선교사 데릭 얼의 집으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소명을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들은 웩 선교회 소속의 데릭 얼과 케이스 글라스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선교회에 소속 되어 있었지만, 한국에 참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부분에는 마음을 같이하는 거듭난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처음에는 한국 교회에 속해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교파와 교리 중심의 한국 교회의 장벽으로 인한 복음 전도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한국인 전도자가 이끄는 거듭난 교회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결국, 그들은 함께 금식 기도회를 가지면서 한국인 전도자를 양성하는 선교학교를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 중 '믿음의 방패 선교회(Shield of Faith Mission)' 회장인 딕 욕 선교사가 그 선교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 딕 욕 회장은 1928년 미국 시애틀에서 태어났는데, 얼마 후 아버지를 여의고 4세 때 어머니와 형, 누나와 함께 캐나다 밴쿠버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다. 그의 나이 16세인 1944년부터는 미국의 한 상선에서 일하면서 끊임없이 짓는 죄로 인해 고통하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22세인 1950년에 밴쿠버에서 복음을 듣고 거듭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후 과거의 자신처럼 방황하는 거리의 노동자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다가 1953년 12월에 믿음의 방패 선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딕 욕 회장이 믿음의 방패 선교회를 설립한 1953년은 한국 전쟁이 끝나는 해였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여 1953년 7월 17일 휴전한 3년간의 한국 전쟁으로 인해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들 중 하나였다. 전쟁 후 수많은 거지들과 전쟁 고아들이 생겨났는데, 그때 한국 교회는 외국인 선교 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이들을 위한 구호 활동에 주력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교회가 1887년 알렌과 언더우드 선교사(미국 북장로교 소속)에 의해 서울 정동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로 늘 예배당에는 구호를 받으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초창기부터 한국 교회는 교육이나 의료 등 사회 봉사 활동에는 주력했지만, 복음을 통해 죄와 사망 등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직접적인 선교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차후 한국 교회사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심리에 '교회는 봉사 활동을 하는 단체로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곳'이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었고, 그 관념이 전쟁 후 절대적인 빈곤에 몰린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교회를 찾도록 이끌었다. 그러한 현상은 외형적으로는 큰 부흥처럼 보였기에 한국에 성령의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놀만 그랍 회장 등 거듭난 하나님의 종들의 눈에는 안타깝게 보일 뿐이었다.


그러던 1956년, 딕 욕 회장은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미국인 선교사의 초청을 받아 새문안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그때 그 역시 한국 교회의 실상을 발견하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 교회의 심각성을 느낀 딕 욕, 케이스 글라스, 데릭 얼, 말론 베이커(미국, Christians in Action 선교회) 등 거듭난 선교사들은 한국인 전도자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드디어 1962년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학교를 시작하고 학생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막 거듭남을 체험한 청년 박옥수는 같은 동네의 문 장로라는 분을 통해 선교학교를 소개 받은 후 딕 욕 회장과 선교학교 입학을 위한 첫 만남을 가진다. 당시 박옥수 청년은 입학에 필요한 자격이나 조건들을 자신이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선교학교 입학에 대해 회의적이었는데, 딕 욕 회장은 거듭난 그의 간증을 들은 후 흔쾌히 입학을 허락한다. 이는 딕 욕 회장을 비롯 당시 선교사들 모두가 다른 무엇보다 분명하게 거듭난 사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1962년은 박옥수 목사의 일생 중 가장 큰 고통과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해였다. 자살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극심했던 죄로 인한 고통 속에서 매일 새벽마다 울면서 회개 기도하던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참된 복음을 통해 온전한 죄 사함과 새 생명을 허락하셨고, 곧 바로 거듭난 선교사들이 세운 선교학교로 인도하셔서 기성 신학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한국 기독교 사상 유래 없는 믿음의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특별한 은총을 입혀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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