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8.1 주일 오전말씀
말씀: 오세재 목사님(남인천교회 시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힘을 주시고 도와 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가지 방법이 있는데도 주님의 도움을 경험하지 못하는것입니다.
본문말씀은 마가복음 10장 46절에서 52절입니다.
자판기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 넣고 원하는것을 누르면 바로 나와야 하는데 안나오면 어떻게 합니다까? 자판기를 때리고 누르고....
사라에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길인데 주님을 찾지 않고 있는게 문제입니다. 조(이)형제님, 주님이 길인데 주님을 찾으면 문제가 해결되는데 ..... 가룟유다. 자기가 지은죄를 해결하기 위해 자살을 했지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자살인데, 하나님을 찾았다면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 방법과 꾀가 있을때는 절대로 주님만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망하면 망하겠습니다. 주님이 일하시는것을 보고만 있겠습니다. 그러면 선할길로 인도 하십니다.
내게는 꾀가 많습니다. 내 방법 수단이 많아요. 박목사님께서, 믿음은 다 있는데 인간의 방법이 있으니까 믿음으로 살지 못한다고 했어요. 인간의 방법을 다 버려야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라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넣어줄때 사라인들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하나님은 늙어도 자식을 낳게 할 수 있는데 몸종 하갈을 넣어줬어요. 인간적인 최고의 방법은 자기를 괴롭게하는 최고의 방법이 되고 말았지요. 이스마엘을 낳아 자기를 괴롭게 했지요.
내 방법이 끝이 나야 믿음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갖고 있는 생각을 버릴때 하나님이 역사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것은 내방법, 꾀, 수단 입니다.
본문에서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메시야가 난다고 믿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부른것입니다. 뭐라했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방법으로 안되니까.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문둥병, 소경을 고치신분이니까 나도 고치실 수 있겠다. 주님은 마음으로 찾는지 즉 중심에서 찾는지를 시험하십니다. 제자들이 조용이해! 그랬지요? 그래도 더욱 소리를 지르면서 "불쌍히 여기세요!"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제일약한것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를때 입니다. 내가 조형제님, 이형제님 같으면 "주님 나를 도와 주십시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그랬을겁니다. 주님을 부르지 않는 이유는 뭡니까? 내 방법과 꾀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람을 이끌 수가 없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하고 구해야 하는다는 거지요. 당장에 좋은게 좋은게 아닙니다. 주님이 도와 주신게 좋은것입니다. 믿음이 아니고 잘된것은 거품과 같은것입니다. 대우그룹 겉으로는 잘돼 보였지만 거품이고 빗덩이였쟎아요.
예수님이 돕지 않으시면 망해야 됩니다. 욥쳐럼 망하면 도와 주십니다. 내꾀를 버리려고 하지 않는게 문제 입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이말보다 솔직하고 아름다운 요청이 어디있습니까? 주님께는 얼마든지 길이 있습니다. 요청만 하면 되는데 왜 요청을 하지 않는가? 바디매오는 마음이 거지였어요. 왜 주님을 불렀습니까? 주님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디매오 마음에 부르짖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49절에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창조주의 발걸음을 머물게 할 수 있는..... 마음 중심에 주를 사모하는 자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소련의 한장교가 빚더미에 눌려 있었습니다. 절망을 하고 종이에 "누가 이 빚을 해결할까?"라고 글을 써 놓고 권총을 자기 머리를 겨냥하고 죽으려다 쏘지 못하고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왕 알렉산더가 지나다가 불이 켜져 있는 장교의 방에 들어가 그 장면과 글을 보고 "누가 이빚을 해결할까?" 라는 글옆에 "알렉산더"라고 적어 놓고 살며시 나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장교가 깜짝 놀랐습니다. 왕이 내 빚을 갚아주신다고? 야! 살았다! 소경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자 였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찾는것을 보십니다.
50절에 겉옷을 내버리고... 겉옷은 신분을 가리킵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지요. 그때는 신분에 따라 옷을 입었습니다. 옷색깔도 다르고 ... 내 자신의 신분, 위치를 나타내는 겉옷이 예수앞에 못나가게 합니다. 군대장관이라는 옷, 이옷이 행복하게 해 주나요? 문둥병이 나아야 하는데 가로막는것은 군대장관이라는 옷이었습니다. 분한마음이 왜 들었나요? 군대장관이라는 껍데기 때문에 생긴것입니다. 벌거숭이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됩니다. 그러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겉옷을 은혜입을때마다 자주 벗어야 합니다. 에스더는 왕후의 옷을 입고 있을때 하나님앞에 못나갔습니다. 무릎을 못꿇게 합니다. 죄인이 되어야 하나님앞에 무릅끓는겁니다. 베옷은 죄인이 입는 옷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은혜 안주시면 안됩니다. 물론 구원을 받으면 죄인이 아닙니다만 마음이 그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51절에 예수님이,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때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은 "오, 그래라. 네 소원대로 되라"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다면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분입니다. 문제를, 모든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보실때는 내가 죽은것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끝났다. 죽었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없다."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노아는 왜 믿음의 사람인가?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봤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마음을 정하셨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채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와야 방주 만듭니다. 노아는 육체를 도구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노아 육체를 도구로 방주만드는데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고 싶었고 소경도 눈뜨기를 원했고. 주님의 마음과 소경의 마음이 일치했습니다. 시편 40:5절에는 주님이 나를 향하여 생각도 많으시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