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마음을 열라!
지난주 부천 평강교회에는 일본의 야마가다(山形)교회에서 선교 사역을 하시는 박찬수 선교사님이 오셔서 귀한 간증과 말씀을 전 하여 주셔서 많은 은혜가 되었기에 부천평강교회 홈페이지에 수록된 말씀을 올립니다.함께 말씀의 은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라!



99.7.18(일)
박찬수 선교사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삿11:1-8]

일본인이 생각하는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로 이번에는 경인지역에 오게 되었습니다. 부천에는 오랜만에 한 10 년만에 온 것 같습니다.
목요일 날 저녁에 와서 금요일 날 오전에 부인회를 한 번하고, 저녁에는 남 인천에 한 번 가고 ,어제는 수원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오늘은 동 안산에 오전 예배를 드리고 저녁에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인데 돌아가면서 하려고 하니까...
왜냐면 경기도 지역이 중요한 지역 이예요! 일본을 팍! 팍! 미니까. 기도로 밀고 물질로 민다고 하니까 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별로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일본에는 주 목사님이 사역자 수련회 때 일본 간증을 했는데 귀신이 많은 나라라고 그렇게 간증을 하시더라 고요. 남 인천에 계실 때도 귀신들린 사람들이 구원을 받더니 동경 가니까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이 와서 구원을 받은 간증을 계속 하시더라 고요.
일본에는 신이 참으로 많습니다. 일본말로 신을 `가미사마` 라고 해요. 그런데 거기는 하나님하고 잡신하고 구분이 잘 안 되요. 다 `가미사마` 라고 해요.
사람들이 죽음 자체를 겁을 별로 안 내요. 왜냐면 죽으면 다 `가미사마`가 되니까!
사람들 생각이 그래요. 죽으면 천국 가고, 지옥 가고 하는 게 아니라 다 신이 되어 버려요.
제 딸이 학교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그 옆에 있던 짝꿍도 기도를 한다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너는 누구한테 기도를 하냐?"고 물으니까 자기는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에게 기도한다고 그러드래요. 아버지가 자기를 지켜 준다고 그러면서 그렇게 믿고 있더라고요.
일본에 대해서 다는 잘 모르지만, 죽으면 다 좋은데 간다고 생각하고 신 이되어 버린데요.
누구 이야기를 들어보면 8000가지 신이 있다고 그러던 데요...
고무신 나막신까지 해서 신이 그렇게 많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다 신 이예요.
돈도 신이고...
우리가 일본 남편하고 사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십 년 이십 년 가까이 살아도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모른 데요. 일본 남편의 속마음을 모른 데요.
한 번도 마음의 이야기를 안 하니까. 마음의 세계가 없다 싶더라고요.
저도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한 번 정도는 해봄직 한 데도 , 물어 보니까 사 오 십 년을 살면서 한 번도 생각을 해 본적이 없데요.
내가 죽으면 어디를 가느냐? 사는 의미가 뭐냐? 이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데요!
그러니까 눈뜨면 일하고, 어두워지면 자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참 답답한 사람이다 싶더라고요.
야마가다는 시골인데 집집마다 가보면 `호드께사마` 라고 섬겨요. 들어보신 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향도 올려놓고 요만한 밥그릇도 올려놓고 차도 올리고 불도 켜놔요.
"땡" 종 한 번 치고 탁! 탁! 손바닥 한 번 치고 아침마다 기도하고 그래요.
왜 하냐고 물어보면 자기도 모른 데요. 다하니까 하는 거래요. 그렇게 사는 분들입니다.
일본에는 잡신이 참 많아요. 정상인도 귀신들릴 정도로 그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거든요.
목사님 말씀이, 트럭 운전사들 중에 많은 사람이 귀신에 들렸다고 그러더라고요.
귀신 들린 사람들은 생활을 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어요. 한 번 씩 발작을 해서 그렇지요!
자기 할 일 다 하면서 귀신이 들려요. 참 고상한 귀신이지요. 성실한 귀신 이예요.
그런 사람 참 많다 하데요.
머리에 이쪽은 빨강 요만큼은 파랑 조기는 노랑머리 잡 색깔을 넣어 가지고 바지는 엉덩이까지 내려와서 이만큼 끌려서 질질 끌고 다니는 학생들도 많고 처음에 보니까 너무너무 이상한 거예요.
남자가 머리를 길러 가지고 묶고 머리에 갖가지 색깔을 드리고 ... 엉덩이에 바지를 걸쳐 가지고 조금만 내리면 벗겨질까 걱정이 되더라 구요.
바지는 또 얼마나 긴지 꼭 거지같아요. 저게 학생인가 싶은 거예요.
처음에는 그랬는데 자주 보니까 `아, 저래 사는가 보다.` 하고 제 눈도 변해 가더라고요.

무릉도원 신앙

저도 일본에 간지 1년 7개월 됐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는데.
다 는 제가 말씀을 드릴 수 는 없지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 그냥 한국 분위기에 따라서 집회나 수양회를 정신없이 하다보니까 마음이 흘러 갈 수 있었는데 일본에 혼자 딱 떨어져 있으니까 이 거품 신앙이 다 날라 가더라고요. 거품 경제처럼 마음의 밑바닥이 들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일본에 형제 자매 님들이 몇 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시집온 분들이 있잖아요. 그 분들 중심으로 교회가 개척이 되었어요.
저희들 교회가 있는데는 신도시 있는 곳에 있는 데 인구가 2만 명 조금 더 되는 곳 이예요.
우리 나라로 치면 `면` 정도가 돼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시집을 간 분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시작이 되어서 개척이 됐습니다.
몇 명이 안되니까 일요일 같은 날은 몇 분이 오셔서 교제를 하지만은 평일 때는 잘 안 오셔요. 대부분 제가 찾아가서 교제를 하고 그러거든요.
형제 자매 님들이 몇 분이 안 되지만, 형제 자매 님들이 조금 좋아지면 저도 좋아지고 형제 자매 님들이 시험이 들면 나도 시험이 들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음이 자꾸 기복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제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이 안되고 금방 곤고함이 찾아오는 이상한 증상이 찾아 왔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계속 집회하고 수양회하고 이럴 때는 제가 잘 모르겠는데 뚝 떨어져 있으니까 제 신앙에 영적으로 하나님과 연결이 안 되었던 것들이 드러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한국에서 듣고 본 것은 많으니까 이러면 안 되지! 하고는,
박 옥 수 목사님 테이프. 김 동 성 목사님 테이프를 듣는 거예요. 막 들으면서 해봐요. `아멘` 도 되고 그래요. 말씀도 은혜롭고 그런데 그 것이 오래 가지를 않는 거예요. 마음에서 연결이 되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뚝! 뚝! 끊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형제 자매 님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나도 따라 마음의 기복이 일어나고 그런 거예요. 좋았다 안 좋았다 그러고 있는 거예요.
어쩔 때 열 받을 때는 마음이 답답한 거예요. 형제 자매 님들이 신앙이 아닌 것 같은 것에 제 마음이 매이더라고요.
저희들의 교회는 아직 조금 어려요. 기도를 많이 해 주셔야 되는데. 지금의 2배로 기도로 밀어 주시면 탄력을 받을 것 같은데. 아직도 교제를 하기는 하지만 교회를 꼭 와야 된다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에요. `시간이 있으면 한 번 가볼까?` 이 정도예요. 꼭 일요일날 교회에 와야 된다는 그런 것은 아직 없어요.
또 농사일 한다면 못 오고. 하여튼 바빠요.
부부가 빠듯하게 일을 해야 먹고살아요. 참 잘 산다고 해도 가난해요. 일본오지 마세요.
오시려면 시골로오지 마시고 동경으로 가세요.
그런데. 이 분들이 삶에 매이다 보니까 기본적으로 자동차가 있고 집이 있고 , 일 년 먹을 쌀을 쌓아 놓고 사니까 먹고사는 것은 걱정이 없어요.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된다! 그러니까 꼭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다.` 라는 마음이 없어요.
신앙생활을 해야된다는 그런 마음도 없고 그렇거든요. 그런 것 때문에 같이 교제를 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제 마음의 간증을 드리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저런 형편에 따라서 제 마음의 기복이 있는 거예요. 또 한국에서 보고 듣고 한 것은 있어서 이러면 안 되는데 싶어 가지고 테이프도 들어보고 기도도 해보고 하는데 하나님하고 계속 연결이 안 되는고 끊어져 버리는 거예요.
제 마음에 곤고함이 찾아오고 답답함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발작 증세가 일어났습니다.
테이프도 들어 봤다 기도도 해봤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니까 텔레비젼을 봤다가 그냥 자 봤다가 그래도 별 수 없더라고요.
하나님하고 연결이 안 되니까 마음이 회복이 안 되는 거예요. 참 답답하더라고요.
주 종식 목사님이 일본 동경에 계신데, 목사님과 교제하고 그럴 때는 이해가 되고 마음에 아멘이 되고 참 좋았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있으면 오래 지속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작년에 겨울 수양회에 오게 됐거든요. 한국에 겨울 수양회에 오니까 전혀 다른 분위기가 형성이 되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잘 아시죠. 자기의 세계가 어떻고 자기 중심의 삶이 어떻고 십자가에서 죽었나 안 죽었나 하고 눈을 떴나 안 떴나 하고... 그렇지요?
이런 교제가 한국 사역 자 들 사이에서 무르익어 가고 있는 거예요. 한국의 겨울 수양회에 오니까 나의 신앙의 모습이 금방 드러나는 거예요.
일본에서 홍역을 치르다가 와서 답답한 거예요. 한국교회들의 사역자 분들 중에서도 자기의 세계가 무너져야지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교제들. 너무나 생소한 말씀들이 교제가 되어지니까, 참 제가 그러한 상태니까 뭐 버티고 할 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한 번 들어보고 저기서 한 번 들어보고 ,아무 목사님이나 붙들고 교제 좀 해달라고 그러고 이제 아무나 붙들고 교제하는 거예요. 여기서 듣고 저기서 듣고 교제하고, `신앙이 아니다!`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고` 하고 교제를 많이 받았어요.
참 많이 교제를 듣고 받아서 갔는데, 그러니까 조금 알겠더라 고요. `내가 자기라는 세계에 갇혀 가지고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 했구나. 내가 정말 마귀에게 속았구나`. 이걸 알겠더라 고요.
내 신앙이 참 잘못됐다. 뭔가 빗나갔다.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일본에 돌아갔어요.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나도 뭔가를 한 번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야겠다!` 자기를 벗어나려면 자기를 깊이 알아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부터 자기를 깊이 알기 시작했어요. 또, 사역 자 테이프 놓고 노트도 펼쳐 놓고 뭐가 악한가? 아, 이게 악하구나! "그래, 난 악한 놈이야." 그러면서 나의 악한 것을 찾는 거예요. 이제 여기 저기서 묻는 거예요. "여보, 내가 뭐가 악한지. 악한 것 얘기해봐!"
악을 깊이 깨달아야지 자기가 죽어 진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이제 찾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을 갔다와서 도를 깊이 닦고 있었어요. 자기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
나라는 것이 뭔가? 나의 세계가 뭔가? 뭐가 악한가? 정말 똥이냐? 지렁이냐 ?...
그런데 "따르릉" 하고 전화가 왔어요. 주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왜냐면., 주 목사님께서 눈치를 챘어요. `박 목사가 야마가다에 가더니만 지금 도 닦고 있구나.`
혼자 도 닦고 있는 거예요. 뭔가 캐내려고요. 지금 도 닦고 있으니까 전화가 오더라고요. 목사님이 눈치를 채셨어요.
"그래. 박 목사! 한국의 교제는 그게 아니고 열심히 혼자서 도 닦으라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신앙 생활을 했던 것이 틀린 것이 아니고 더 밝게 신앙 생활을 하고 마음을 열고 교제를 하라고 한 것이고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려고 한 교제이네! "
목사님이 방향을 잡아 주시는 거예요. 나는 이것이라고 하면 이것만 파고 있는데. 또 이게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제 마음에 중심이 없는 거예요. 중심을 잃어 버렸어요.
한국 수양회에 가서 이거라고 하면 이거다 싶어서 들어 봤다가 해보기도 하고 깨달아 보려고도 하고 그랬었어요.
주 목사님이 아시고 교제를 해주시는데 그럼 이쪽도 파고 저쪽도 파야 되나 싶은 마음도 들고 그러더라 고요.
그러고 난 이후에 일본에 있는 사역 자 님들에게 이것이 충격이 되어지고 교제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교제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가지고 마음을 열고 목사님에게 제 마음에 있는 얘기를 할 수 있었거든요.
한국에 갔다오고 나서 제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을 드러내 시더라고요. 내 마음에 있는 악한 것들을 말입니다.
한국 겨울 수양회 갔다 오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교제를 하고 그 분위기로 좀 익숙하고 해서 저희 교회 집회를 하는데, 강사 목사님이 누구시냐 하면 이 윤식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저도 오시면 오랜만에 한국에서 오시니까 이 윤식 목사님하고 교제를 좀 해야겠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 은혜를 입어야 되겠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공항에 가서 목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집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시작이 되면서 영혼을 초청하고 집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윤식 목사님은 제가 알거든요. 제가 대전에 구원받고 조금 있다가 수양관에서 같이 일을 했거든요. 그 때 만났거든요.
그런데 제가 일을 하면서 그 형제를 볼 때 걷는 폼부터 껄렁껄렁한 거예요.
그리고 나서 저는 선교학교에 들어오고 한참 있다가 이 윤식 목사님이 들어 왔으니까 제가 한참 빠르거든요. 하여튼 제가 별로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저는 얌전 스타일인데, 저는 껄렁껄렁한 스타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제 집회강사로 오신 거예요. 하지만 그런 것 다 무시하고 은혜를 입어야 되겠다 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목사님에게 교제를 조금 하자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교제했던 이야기도 조금 했습니다.
집회니까 제가 예배당 청소도 하고 방석도 깔고 다 하거든요.
이 윤식 목사님이 오셔서 집회를 하는데 쭉 말씀을 듣는데 찔리는 말씀도 참 하시고 제 마음에 도전도 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제 아내가 고자질을 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밥을 먹고 나면 저는 예배당에 나와서 청소도 하고 방석도 깔고 하는데 제 아내는 방에서 이 윤식 목사님하고 그 사모님하고 안 나오는 거예요. 제 아내와 그 사모님하고 `뭐라 뭐라`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라고요.
나는 예배당에서 청소하고 있는데. 나와서 청소 할 생각도 안 하고 고자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거예요.
그러면서 이 윤식 목사님이 저를 보고 하는 이야기가 저의 마음을 툭툭치는 거예요.
"선배! 혼자서 무릉도원을 걷지 마세요!" 그러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이야긴가? 도사들이 바둑을 두는 곳이 무릉도원이잖아요. 한 번 두면 천년이 지나가는 자리잖아요. 그러니까 저보고 혼자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거예요. 하여튼 그 때부터 마음이 상하는 거예요.
"선배!" 하더니만 푹 찌르고 가는 거예요. 그럼 교제를 해주던가? 그렇지요?
그리고 제가 딱 열을 받은 것은,
`제 아내가 고자질을 했구나! 내가 교제를 하면 안 듣는 다고 했나? 왜 우회 작전을 벌이냐 ?`싶은 거예요.
우회 작전을 아시죠. 바로 안 오고 돌아서오니까 푹푹 쑤시는 거예요. 그래도 참 교제를 받아야 되겠다 싶어서 교제를 했는데 그때 무슨 교제를 했는지는 잘 기억은 나질 않습니다. 그런데. "선배!" 하더니 푹푹 쑤시고 가고 `무릉도원을 걷는다`느니 하고
믿음이 아니고 자기세계에서 못 벗어나고 하는데 제 마음에서 못 받겠어요. 안 받아 지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아내에게 화살이 가더라고요. `무슨 말을 했지?` 싶고 ,저는 밥 먹고 나와서 청소하고 방석 깔고 하는데 왜 밥상을 안 치우고, 나와서 청소는 안 하고 사모님하고 쑥덕쑥덕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니까 신경질이 나더라고요. `그래, 잘 해봐라. 너는 신령하다!`
사람이 참 유치하고 쫀쫀해 지더라고요. 이러면 안 되는데 마음의 바닥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생각이 자꾸 나더라고요. 혼자 있을 때는 아무 말도 안 하더니 목사님이 오니까 물고기가 물 만난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요 것 봐라. 나는 자기하고 교제 할 상대도 아니라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자꾸 드니까 나를 무시하는 것 같고... 참 아내가 어려우면 "여보, 교제를 좀 해주세요." 하고 와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 있을 때는 안하고 목사님이 오니까 물 만난 물고기예요. 그러니까 온갖 생각이 나는 거예요. 하여튼 쫀쫀한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거는 아닌 것 같은데.......`
집회 마지막 날이 되어서 저녁에 교제 좀 합시다.하고는
"제가 말씀을 들으면서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지 못하는 모습이 꼭 내 모습 같다!"고 그러니까 대번에 이 윤 식 목사님이 "사모님, 빨리 와 보십시오! 드디어 마음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이야긴가?` 싶은 거예요. 지금까지 마음의 이야기를 안 했다 이거지요.
"여보! 다 종들이 우리를 위해서 하는 얘기예요." 하면서 옆에서 거드는 거예요.
"여보! 말씀해 보세요." 그러니까 딱하기 싫더라고요.
그 때부터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다 치워 버려라.` 싶음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래, 교제고 뭐고 너 혼자 다 신령해져라. 우리끼리 얘기니까 이야기하면 안됩니다. 하여튼 이런 마음이 막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예전에는 이런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거든요. 제가 얼마나 얌전하고 순종파고 그런데 말입니다. 일본에 가서 버려 버렸어요. 이제 마음이 삐딱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남자도 별 수 없는 것이 정말로 쫀쫀한 생각이 나는 거예요. 마음 좋을 때 태평양이지 마음이 안 좋으니까 바늘 콧구멍 같은 거예요. 그만큼 얇아지는 거예요. 생각이 들어오니까 마음이 닫혀 지는 거예요. 아내에게도 이 윤식 목사님에게도 마음이 닫히는 거예요.
괜히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거예요. 말 안하고 있으니까 교제가 끝나더라고요.
어쨌든 저희 집회가 끝나고 이 윤식 목사님은 동경에 또 가셔야 하니까 빨리 동경에 보내 드렸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하고 나니까 동경 집회에 한 번 가야 하기는 가야 하는데 가기가 싫은 거예요. 동경하고 저희하고 한 6시간 거리거든요. 어쨌든 가야 하니까 제 아내하고 같이 갔습니다. 진짜 무거운 발걸음으로 갔어요.
내가 왔다니까, 목사님이 참 반가워하시는데 제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가 하면 `전부 나를 비웃는 구나! 교제 밥이 왔다고 좋아하는구나!` 그런 마음으로 보이는 거예요.
저는 하나도 안 반가우니까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어요.
참 일본에 가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목사님이 눈치를 차리셨는지 한 시간 말씀을 전하라고 하더라고요.
"목사님 저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래도 전하라고." 그래서 억지로 전했거든요. 목사님이 눈치를 차리시고는 교제를 청하셨습니다.
그래서 주 목사님에게 창피하지만 그 이야기를 했어요. 야마가다에 있었던 일을 전했어요.
"글쎄, 저보고 신앙이 아니다! 믿음이 아니다! 혼자서 무릉도원을 걷는다! 그래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웃으시더라 고요.
"박 목사 자네 참 새로 봤네."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 고요.
이렇게 좁은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다고 그러시더라 고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유치하고 쫀쫀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랬습니다. 교제를 하면서 조금 풀려서 왔는데 전에는 그런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악한 마음이 일어나고 다 치워버리고 싶고 유치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랬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이런 마음이 나오지 않았는데 일본에 오니까 막 이런 마음이 드러나기 시작을 하는데 제 마음에 다 들어 있더라고요.
`아, 이래서 떠나는 구나. 이게 대적이구나!`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 이런 것들이 드러 나는데, 교제를 하면서 제 마음이 정리가 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 얼굴을 보니까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인 거예요. 저는 제 아내 눈치를 보고 살거든요. 제 아내의 얼굴을 보면 알아요. 이건 믿음이 아니다.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제 아내 얼굴을 보니까 벌써 저 방가서 성경 읽고 기도하고 야단인 거예요. 그런데 저는 자꾸 제 아내가 저를 무시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거예요. 저는 어느 정도 좋아졌다고 생각을 하고 풀어졌는데 제 아내 눈치를 보니까 `넌 아직 멀었어.` 이렇게 보이는 거예요.
제 아내에게도 마음이 닫히면서 `그래, 당신은 많이 깨달았나? 사모님하고 교제를 하더니 은혜를 많이 입었네. 당신은 자기에게 해방을 팍 받아서 신령해져라!`
하면서 계속 튀기는 마음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메이고 쪼여오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 제 모습이 드러나고 제 아내에게도 마음이 닫히고 그랬습니다.

미련한 당나귀 귀 임금님

그런데 은혜로 동화책을 한 권을 봤습니다. 제 아이가 보는 동화책인데. 성경을 봐서 안 깨달아지면 동화책이라도 봐야지요. 그런데 너무나 은혜가 되는 말씀이 이야기 속에 있더라 구요!
옛날에 아주 자존심이 세고 거만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언제나 모자를 쓰고 있었답니다. 왕은 밥을 먹을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산책을 할 때도 모자를 쓰고 있었답니다. 이 나라의 어느 누구도 임금님의 모자를 벗은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답니다. 심지어 왕비까지도 ......
그런데 이발사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답니다. 왕이 이발사들을 불러서 이발을 하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한 명 두 명 왕궁으로 가더니 이제는 마을에 이발사가 두 명이 남았습니다. 한 명은 늙은 이발사이고 또 한 명은 젊은 이발사였습니다.
어느 날 왕명이 떨어졌습니다. 문을 쾅! 쾅! 쾅! 두드렸습니다.
"여봐라 명령이다!"
누구 집에 찾아왔느냐면 젊은 이발사 집에 찾아 온 거예요.
"임금님의 명령이다. 빨리 왕궁으로 오너라!"
이 젊은 이발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발사는 이발기구를 챙겨서 왕궁으로 들어 갔습니다. 임금님이 머리를 깎기 위해서 앉았는데 임금님이 거울 앞에서 모자를 탁 벗었습니다.
그 때 이발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면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의 귀처럼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발사가 이발을 두려운 마음으로 다 마치고 나니까 임금님은
"내가 너를 살려 줄 테니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만약에 누설하면 너는 죽게 되느니라!"
그래서 이발사는 굳게 약속을 하고 왕궁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이발사에게 임금님의 모자 벗은 모습이 궁금한 백성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임금님이 모자 벗은 모습이 어떠냐고.
그러나 이발사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발사가 배가 계속해서 불러오는 병에 걸렸어요.
그래서 병원 가서 의사에게 물었더니 속병이 걸렸다고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 해서 걸린 병이
라고 했습니다. 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아무도 없는 숲 속에 가서 큰 소리로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발사는 산에 올라가서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외치고 나니까 배가 들어갔습니다. 또 배가 불러오면 산에 가서 외치고 바다에 가서 외치고 나무를 보고 외치고 들을 보고 외치고 바람을 향해서 외치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난 후 어느 날 숲을 지나가던 목동이 거기서 나무를 꺾어서 피리를 만들어 불었는데 글세 피리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하고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기한 피리를 임금님에게 가지고 가서 드렸습니다. 임금님 앞에 가서도 이 신기한 피리를 불었는데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피리가 소리를 냈습니다.
너무나 화가 난 왕은 그 젊은 이발사를 불러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이발사는 사형에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의 귀!!!"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절망과 실의에 빠진 임금님은 왕궁으로 올라갔습니다. 지붕에 올라가서 온 백성들을 모으고 여러분 여기를 보세요.
임금님은 모자를 벗었습니다.
"여러분! 제 귀가 이렇게 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야기를 잘 들으라고 이렇게 큰 귀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저에게 잘 얘기 해 주세요."
저는 그 이야기가 성경보다 더 마음에 와 닫는 거예요. 꼭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거예요. 저는 진짜 같이 사는 제 아내에게도 속마음을 얘기한 적이 없으니까요.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저는 마음의 것을 이야기하고 하는 것이 참 모자랐거든요.
이 왕은 이 큰 당나귀 귀를 감추기 위해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낸 거예요. 그러나 이 왕이 마음하나 바꾸고 나니까 너무나 좋은 귀인 거예요. 참 어진 왕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수치가 되고 모자란 모습은 자꾸 가리고 나에게 좋아 보이는 것들은 나타내어서 인정을 받으려하고 그런 성품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잘 난 것은 나타내고 못 난 것은 감추는 것이 화장 기술인데 우리 속에 이런 것들이 있는데 나의 부족한 모습은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감추고 싶은 마음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다 알고 수근수근 거리고 있는 거예요. 이 왕의 모습이 딱 제 모습 같은 거예요. 이발사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이 산이, 바다가, 나무가, 강이, 들이, 바람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는데 그 때 이 왕의 마음이 달라지더라 고요. 마음이 옮겨진 거지요.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제 마음을 드러내시더라 고요.
저희 악한 마음, 좁은 마음들을 드러내셨습니다.
저의 신앙을 교회가 알고 이고 종이 알고 있고 형제 자매님들이 다 알고 있더라고요. 저만 모르고 있었습니다. 전부다 말을 안 해서 그랬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날 말씀을 들으면서 제 마음에 있는 얘기를 좀 했습니다. 그날 저도 모자를 벗었습니다. 저의 수치스럽고 연약한 모습들을 마음의 모습들을 드러냈습니다.
그랬더니 좋아하시더라 고요. 그러나 비웃지는 안더라 고요.
그러면서 저에게 마음을 여는 형제 자매 님들의 마음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모습이 드러나면 저를 비웃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저와 더욱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나의 수치가 드러날 까 봐서 가리기 위해서 너무나 고통 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저의, 여러분의 신앙을 다 알고 있어요. 자기만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만 가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드러내시더라 고요. 저의 악한 마음 좁은 마음을 들추실 때마다 종들과 교제를 하고 마음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형제 자매 님들에게도 저에게 이런 마음이 있었다고 간증을 하고 나니까 마음이 자유로와 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그 마음에서 벗어나게 되어 졌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가리고 나를 방어하고 이런 것에서 하나님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옮겨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정이 되어 지는 거예요.
저는 동 안산 전도사님에게 참 살아나셔서 참 감사하거든요. 여러분도 감사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살아난 것만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살아난 것만이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감사 안 합니까? 왜 반쪽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십니까?
분명히 살아 난 것도 감사하지요. 감사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에 전도사님께서 빠져 죽어도 그것도 감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빠져 죽게 했다면 그것도 감사한 거예요.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 많이 선악의 논리로 신앙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참 좋고 선해 보이면 이건 은혜다 하고 사업이 잘 될 때만 하나님의 은혜다 하고 망하면 이건 은혜가 아니다 하잖아요. 반쪽 하나님만을 믿고 있잖아요. 하나님은 죽게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업을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잖아요. 그건 다 누가 하시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잖아요.
어떠한 일이라도 그건 하나님이기 때문에 감사한 거예요. 오늘 저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라!

사무엘 상 28장을 보면 어떠한 이야기가 나오냐면 사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사울이 다윗을 쫓아내고 제사장을 죽이는 그런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이잖아요. 이 사울이 하나님을 찾았을까요? 안 찾았을까요? 찾았습니다! 다윗이 쫓겨나고 블레셋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 때 보니까 사울이 하나님을 찾더라고요.
성경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사무엘 상 28장 6절입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여기 보면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블레셋이 쳐들어오니까 다급해져서 하나님을 찾더라 고요.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를 찾아갑니까?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잖아요. 그래서 사울 왕은 이 날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부르면 되는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다윗을 데려오면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데려오기 싫은 거예요. 자존심이 상하니까 다윗는 데려오기 싫으면서 하나님을 찾으니까 응답이 없는 거예요. 이유는 거기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빨리 다윗을 데려와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윗을 데려오면 되는 거예요. 다윗는 안 데려오고 하나님을 찾으니까 응답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하고 부르짖는데 응답이 없는 분들은 뭐하러 하나님을 자꾸 찾습니까?
참 간단하거든요. 저도 강대 상 뒤에서 엉덩이를 쳐들고 "하나님!" 하고 찾아도 응답이 없더라 고요. 오른쪽으로 가라! 왼쪽으로 가라! 해야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응답이 없더라 고요. 아무런 계시도 없고 계시가 하나 오기는 오는 데 잠 계시가 오더라고요.
신앙 생활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참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님!" 하고 부르짖고 그냥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바로 여기 가까이 있습니다. 다윗을 데려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전쟁에 승리를 하기 위해선 다윗을 데려오면 전쟁에 승리를 하거든요. 하나님의 응답이 다윗이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이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렇게 묻고 기도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하나님은 응답을 다 해놓았잖아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응답을 다 해 놓았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다윗을 데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사기 11장에도 똑같은 이야기예요.
입다라는 사람이 나오지요.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길르앗이라는 사람이 아내가 여럿이 있었는데 또 여러 자식이 있었는데 입다는 그 중에서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길르앗의 본 처의 아들들이 너는 기생의 아들이라고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껄렁 패들하고 잡류들하고 몰려 다녔습니다.
근데 길르앗 족속에게 암몬 족속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 때 이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갔습니다. 자기들이 기생의 아들이라고 쫓아냈던 입다를 찾아갔습니다. 지금 그 얘기거든요.
5절을 봅시다.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이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부르러 가더라고요. 예전에는 기생의 아들이라고 쫓아내더니 이제는 우리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 찾아 온 거예요. 같이 더불어서 싸우자고 왔잖아요. 지금으로 보면 나라의 장관 정도 되는 사람인데 자존심을 꺾고 찾아오더라고요. 그러면서 입다를 데려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입다와 함께 전쟁에 승리를 했다는 얘기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을지 모르겠습니다.

결과를 미리 생각하지 말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악을 드러내셔서 우리를 이렇게도 인도하시고 저렇게도인도를 하십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닥쳐와도 나에게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어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자, 우리 이런 얘기를 해봅시다. 우리가 주일 날 말씀을 들으면서 참 은혜로울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내가집에 가서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잖아요. 그런데 집에 갔는데 TV를 틀었습니다. 그러면서 뭐 신창원이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보는 거예요. 이렇게 저렇게 하다보니까 밤 11시가 넘은 거예요 이상하지요? 조금 전까지는 많이 은혜로웠는데 와서 보니까 TV 보고 뭐하다 보니까 성경은 고사하고 기도도 못하고 잔 거예요. 자다 보니까 머리는 아프고 은혜는 사라지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적이 있습니까? 저는 또 저 혼자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기면서 `그래, 오늘부터는 믿음이다. 믿음만이 살길이다.` 그런 마음이 생기잖아요. `그래, 복음밖에 없다. 복음을 위해서 죽자!` 그런 마음으로 집으로 갔는데 TV보고 어쩌다 보니까 성경도 안보고 기도도 못하고 마음이 찝찝한 거예요. 그렇지요?
이런 일이 몇 번 있고 나면 `그래 뭐 다 말씀을 들을 때는 은혜롭지. 다 그런 거지. 마음대로 안 되는 것 아니겠나? 잘 안 되는 거지 뭐?` 마음이 이렇게 흘러가게 되잖습니까? 그렇지요? 우리는 육신이 약해서 그렇다고 참 많이 핑계를 하잖아요. 그러면서 체념이 되고 말씀을 들을 때는 은혜롭고 집에 가면 다 팔아먹고 이런 것이 마음에 감각이 되어지지 안을 정도로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은 말씀에게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해가 되든 안 되든 마음을 여는 거예요.
나사로가 냄새가 나든지 말든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면 말씀이 그러니까 하는 거예요. 내 냄새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냄새에 맞추어야하는 겁니다. 죽은지가 나흘이 되든 백일이 되든 그건 상관이 없는 얘기거든요. 죽어서 쪼그라지든 팽팽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우리는 자기가 보기에 죽은지가 오래 되고 그래서 냄새도 나면 당연히 안 된다는 마음을 가진다는 겁니다.
자, 여러분의 마음에 오늘 이것을 깨뜨려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 주님이 나를 돕고 계신다. 마음을 열고 있으면 나를 도와주시고 나에게도 역사한다. 이런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근데, 집에 가니까 안 되는 거예요. 교회에 있을 때는 분명히 그랬는데.......
우리 마음이 TV에, 세상 것에 다 가버렸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교회에 있을 때는 믿음이 들어 왔는데 집에 오니까 TV를 봐서 잘 안되네.` 하고 마는 거예요. 그렇지요?
여러분 속지 마세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마음이 열려 있을 때에는 말씀이 살아 있지요? 그럼 여러분이 TV를 보고 세상에 마음이 빼앗긴다고 말씀이 죽습니까?
말씀은 항상 살아 계시잖아요.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께 마음을 닫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늦잠을 자고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안하고 했다고 칩시다.
그것이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씀은 주님 그대로예요.
내가 보기에는 안 되는 것 같고 그래도 말씀은 그대로 살아서 역사합니다.
지켜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할 마음은 `내 모습은 지금은 이럴지라도 주님의 말씀이 그렇다면 나를 바꾸시겠다.` 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하나님에게 마음을 여십시다.
우리가 TV를 봐도 그것도 바꾸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는, 교회에 있을 때는 마음이 활짝 열려 있다가 집에 가면 마음의 문이 금방 닫혀버리는 거예요. 괜히 체념하고 포기하고 그렇잖아요. `나는 역시 신앙 할 체질이 아니야.` 하면서 말입니다.
신앙 할 체질이 따로 있습니까? 주님이 하게끔 다 만들어 놓으신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참 많이 스스로 하나님에게 마음을 닫는 다는 겁니다.
왜냐면, 결과에 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노트에 적어 두십시오. 마음에도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런 것은 전부다 결과에 기대를 가지기 때문에 오는 증상입니다. 저도 참 많이 그랬습니다.
저도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이건 믿음이다!` 그리고 일본에 가면 뭔가 될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 뭔가가 될 것 같고 그렇잖아요. 그러면서 여러분의 마음은 말씀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결과를 기대하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생활이 바뀌고 성경이 읽어지고 깨달아지고 믿음으로 살 것 같은 마음이 일어나지요.
머리 속에서 결과가 보이잖아요.
`혹시 선교학교에 가라고 하면 어쩌지?` 이런 마음까지도 들잖아요.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에 대한 결과를 미리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과를 생각하고 집에 갔는데 삶은 내 생각의 결과와 같지가 않은 거예요.
말씀을 들을 때는 이렇게 될 것 같았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닌 겁니다.
내가 생각한 결과하고 다를 때는 `아, 말씀이 아닌가 보다.` 하고 마음을 닫아 버리는 거예요. 참 중요한 얘깁니다. 우리가 참 많이도 결과에 매이는 신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결과와 상관이 없어요.
목사님이 여러분에게 "올해 안에 영혼은 500명을 붙일 겁니다." 그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일년이 지나고 나니까 500명은 고사하고 50명도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결과를 보니까 500명이라고 외쳤는데 50명도 안 되는 거예요. 결과를 보면 매이지만 믿음은 결과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 보고 죽을병이 아니다" 했지만 죽더라고요. 그렇다고 `죽을병이 아니다.` 라고 하신 말씀이 죽었습니까? 아니더라고요.
"네 오라비가 살리라!"
하신 말씀은 나사로가 썩었을 지라도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나사로가 죽어 버리면 `말씀대로 안 되네.` 하면서 말씀을 버리는 거예요.
마리아와 마르다가 말씀에 마음을 닫아 버렸어요. 분명 살리라 했는데 죽으니까 말씀을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말씀에 마음을 닫아 버리는 거예요.
자신의 눈에 보기에 죽어 버리니까 말씀도 죽은 줄 알고 마음을 닫아 버리는 거예요. 자기 눈의 자기 코의느낌에 죽은 것 같으니까 말씀도 죽은 줄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면서 말씀을 향해서 마음을 닫아 버리는 거지요.
여러분 마음에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마음을 일으켜 주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삶을 살다보면 잘 안 되는 겁니다. 잘 안 될 때가 많잖아요.
안 되더라도 그 말씀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는 쉽게 결과가 될 것 같은데 안 되면 말씀을 의심하는 겁니다. 담배가 안 끊어진다. 술이 안 끊어진다. 그 결과에 집착해서 말씀을 의심하고 나에게 들어 온 믿음을 의심하는 거예요. 왜, 나의 눈에 보이는 결과와 맞지가 않으니까!
마음을 연다는 것은 믿음은 결과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정말 중요한 얘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여세요. 내가 하나도 안 바뀐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바뀐다고 얘기 하셨으면, 바뀐다는 말씀을 하셨으면 그 말씀은 형편이 어떠하든지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살아있는 말씀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있으면 역사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이 우리가 마음을 닫고 있다는 거예요. 교회에서는 충만했는데 집에 오니까 안 되네요. 하면서 말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변화가 안 된 것 같아서 그런 것이지!
말씀은 여러분 곁에 항상 살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마음을 열기를 정말 바랍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라!

제가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무엘 상 25장에 보면 아비가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비가일의 남편이 나발이지요.
이 나발은 부자였습니다. 양이 삼천, 염소가 천 마리를 가지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나발이란 뜻은 불량자란 뜻이거든요.
여러분! 아비가일이 처음에 나발을 남편으로 삼을 때 싫었는데 결혼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 아비가일은 나발을 좋아해서 살았는데 알고 보니 정말 미련한 나발이고 불량한 사람인 거지요.
그런데 다윗은 양을 지켜주는 담이 되어 주었잖아요. 그래서 양털을 깎을 때 10명을 보내서 은혜를 구했잖아요. 이 나발은 정말 나발 같은 짓을 했잖아요. 그래서 나발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 것을 알고 다윗이 나발을 죽이러 올 때 아비가일은 다윗을 영접했잖아요. 다윗에게 무릎을 꿇고 은혜를 구했을 때 다윗이 돌아 갔잖아요.
그런데 이 나발은 왕 같은 잔치를 버리고 있었습니다. 술 다 깨고 나서 죽을 뻔한 사실을 이야기하니까 놀라서 굳어 버렸지요.
그 다음에 성경을 보면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났잖아요. 그런데 왜 따라가지 않았을까요?
다윗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고 나발은 육신의 그림자입니다.
이 아비가일이 다윗을 따라가지 못한 이유는 아직까지 나발이 육신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마음이 활짝 열렸지만 따라 갈 수는 없어요. 왜냐면 남편이 살아있지 때문 이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발을 죽여야 합니까? 청산가루 풀어서 죽여야 하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아비가일이 밥 할 때마다 고춧가루 확 풀고 청산가리를 풀고 그랬지요? 아닙니까? 예 그렇게 죽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발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다윗을 쫓을 수가 없었어요. 그 후 나발이 죽고 나서 아비가일이 다윗에게로 왔습니다.
아비가일은 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경에 놀라운 것이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하고 나오는데 그 때 아비가일은 다윗에게로 가더란 말입니다.
그 때는 자유롭게 다윗을 쫓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다윗은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이고 나발은 육신의 그림자잖아요.
이 아비가일은 우리를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쫓고 싶은데 따라 갈 수 없는 것은 아직 나발이 우리의 육신의 것이 살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날마다 청산가리를 뿌려야 되겠습니까? 수면제를 먹여야 되겠습니까?
참 제가 은혜가 되는 것은 언제 나발이 죽었냐면 안 죽고 있다가 죽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양털을 깎을 때 다윗이 왔다간 이후에 나발이 죽는 계기가 있는데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마음이 열렸을 때입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마음이 활짝 열렸을 때 나발은 하나님께서 쳐서 죽더란 말입니다. 그 것을 제가 보면서 참 은혜가 되는 것은 이 육신은 자기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이고 내가 절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TV를 안 봐야지 내가 다시 또 보면 그 때는 장을 지지고 말테야!`
결심한다면 아마도 많이 장을 지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 육신은 내가 제어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시는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하고 백날 결심을 해도 또 하잖아요. 항상 다음부터잖아요.
나발은 하나님이 제거하는 것이란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내가 없애 볼려고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은혜가 되는 것은 아비가일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다만, 한 것이 있다면 다윗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고 있었어요. 아비가일이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고 있더니 나발이 죽더라고요.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비가일이 다윗을 마음껏 다윗을 쫓을 수 있게 해 주시더라고요.
이해가 되십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결과가 여러분 보기에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열어 보라는 것입니다. `아, 말씀이 살아 있으니까 나사로가 썩어도 산다!` 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해서 열고 있으면 참 신기한 것이 TV하고도 아주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나쁜 습관, 하나님이 불편해 하시는 것과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발을 죽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할 것이 있습니까? 청산가리, 수면제를 들고 다녀야 합니까? 자, 우리가 할 것은 단 한가지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있으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향해서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서울에 어느 모친이 수양회도 많이 참석하고 집회도 많이 참석한 분입니다. 그런데 집회 때만 되면은 손을 들고 나오는 거예요.
"목사님, 예수님이 내 죄를 가지고 가셨는데 그래도 내 죄가 조금 남았어요. " 하고 항상 말씀을 하시는 모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다 가지고 간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조금 있는 것 같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목사님께서 교제를 하면서 이야기하시기를 "모친 님 참 능력도 많으십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2000년 전에 가지고 가신 죄를 예수님에게서 빼앗아 가지고 오실 수가 있는지 참 능력도 많으십니다." 라고 하신 거예요.
그 모친 님이 생각을 해보니까 자기는 너무나도 능력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형광등이 반짝하고 들어와서 구원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가지고 가신 죄를 다 해결해 놓으신 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빼앗아 온 것 아닙니까? 그러니 얼마나 재주가 좋고 능력이 많은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예수님보다도 능력이 많은 거잖아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연약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만 가지고 가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슬픔을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슬픔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슬픈 사람은 예수님보다 능력이 많아서 자기가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에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방법으로 가지고 있습니까? 생각에서 죄를 생각에서 슬픔을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목마르다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목마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우리에게는 목마름이 없어요.
주님이 다 담당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목마른 이유는 생각에서 목마른 거예요. 우리는 슬퍼 할 수도 목마를 수도 연약할 수도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더라고요.
이 사실을 마음에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현실로 돌아가니까 변화는 무슨 변화! 연약함, 실수, 슬픔인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은 나그네길 ~ ` 하면서 빨리 가고 싶은 거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 눈으로 보는 것에 느끼는 것에 마음을 두고 살고 있으니까 복음은 살아서 있는데도 마음이 힘이 없는 거지요.
그것이 바로 말씀을 향해서 마음을 닫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형편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서 끌려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마음에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지만 사단에게 속지 마십시오.
제 마음에 아비가일이 다윗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고 있었을 때 나발이 죽어버리더란 말입니다.
여러분! 나발을 없애려고 애쓰지 마시고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여십시오. 말씀을 향해서 여세요. 사울은 빨리 다윗을 데려와야 하는 겁니다.
길르앗 자손들이 암몬 자손이 쳐들어 왔을 때 빨리 입다를 데리고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해서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여는 것이 막연하시면 말씀을 향해서 열어 보십시오.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면 집에 가서 안 되더라도 말씀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잊으셔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그렇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있으면 나발은 끝나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어 주시더라고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악한 마음을 시인하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을 인정해 보십시오. `주님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 당신이라면 저를 바꾸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집에 가서 자든, 무엇을 하든 ,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계속해서 열고 있어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에게 열고 있으면 육의 것을 꺾어 주시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마음을 닫아서 `나는 신앙을 할 체질이 아니다. 우리 교회는 영적인 사람 따로 있고 육신 적인 사람 따로 있는데 나는 육신과 인가보다.`라는 마음으로 자기가 스스로 신앙을 점수 메기고 있는 거예요.
알아서 육신으로 가는 거지요. 이 것이 바로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슬픔도 연약함도 사망도 정죄함도 이미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 왔을 때 변하지 않는 것이 기적입니다.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 온 것이 바로 마음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 하려고 하다가 아버지에게 돌아 온 것은 아버지 중심으로 마음이 옮겨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 변할 수가 없어요. 이 아들은 변할 수밖에 없는 사람 이예요.
왜냐면 수염을 안 깎으려고 하면 아버지가 가위로 깎아 버리는 거예요.
옷을 입혀주시고 먹여주시니까 이 아들은 안 변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에 우리는 바뀐 겁니다.
여러분이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기는 바랍니다. 심지어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졌을 지라도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여십시오.
누가 부러뜨렸습니까? 하나님이 부러뜨린 것이잖아요. 그렇지요.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구나!`
하고 마음을 여는 거예요. 사업이 망해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인정하시고 마음을 여십시오.
성경을 보겠습니다. 시편 139편입니다. 참 은혜로워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란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하나님은 다 아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앉고 서심도 생각도 아시며 나의 전후를 두르셨어요. 모르시는 것이 없고 주님에 손안에서 이루워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2절은 "주에게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16절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간이 나시면 139편을 다 읽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대하면 마음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시고 나의 형질이 이루워 지기 전에 아시고 계신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고 계시면 된 거잖아요. 우리의 모든 앉고 섬을 아는 하나님에게 마음을 여세요. 우리의 모자란 눈의 느낌 때문에 말씀에게 마음을 닫느냐는 거지요. 사업이 안되면 닫고 자기의 성질대로 안되면 닫고 그건 참 어리석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목사님이 인사 안 받아 줬다고 닫고 이 자매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닫고 버스 안 태워줬다고 닫고...
형편을 보면 닫을 일이 많잖아요.
그런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인정하면 마음을 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마음을 하나님에게 여세요. 어떠한 결과나 여러분 보기에 상관없이 열어보세요.
하나님을 향해서 열고 있으면 이 것은 승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데려오기 만하면 그 전쟁은 승리를 하는 겁니다. 길르앗 자손이 입다를 데리고 오면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있으면 변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마음에 인정이 되십니까? 제 마음에도 이런 마음이 들고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열게 하시더라 고요.
저도 참 마음이 좁은 사람이고, 아내 하나 수용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형제 자매 님을 수용하려고 하니까 터지는 거예요. 제 마음으로는 못 안지만 하나님이 여셔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열 수가 있는 겁니다.
저도 일본에 가니까 제가 감당 할 수 있는 분이 한 명도 없더라고요. 주님이 제 마음을 잡아 주시지 않으면 안되겠더라 고요. 하나님께 마음을 여니까 좋더라고요.
눈이 많이 와도 좋고 한 명이 와도 두 명이 와도 좋고 안 오면 찾아가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 마음이 생기는데 하나님에게 마음이 닫히니까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나?...... 라는 마음이 생기더라 고요.
하나님에게 마음을 열면 여유가 생기고 감사가 있고 간증이 있고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마음을 열게 하시려고 문제를 주시는 거예요.
`네가 이런 일에도 나에게 마음을 열 수가 있느냐?` 하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예, 주님 열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게 팍! 팍! 마음을 열고 내 눈을 가리고 내 코, 내 입을 가리고 하나님에게 여세요.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을 바꾸어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 일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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