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이끌림을 받았는가?
우리는 너무도 큰 복을 받고 살아 갑니다.
진리가 없는 세상중에서 늘 진리의 말씀을 공급 받으며 살아 가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오늘은 부천평강교회 홈페이지에 수록된 말씀 중에서 "어디에 이끌림을 받았는가?"라는 제목으로 된 이충학 목사님의 주일 낮 말씀을 소개 합니다.



부천평강교회 주일낮 말씀 모음




어디에 이끌림을 받았는가?



99.7.11(일)
이 충학 목사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 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아람 왕이 가로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벌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 5:1-14)

 


느 갓 구원을 받은 형제가 기도회에서 기도를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교회를 한번도 다녀보지 않는 중에 구원을 받으신 분들도 많은데 그런 분들은 종교적인 습관들이 없잖아요. 어떤 분들은 찬물 한 그릇을놓고도 기도하고 마시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봐야 되는가 잘모르겠는데... 기도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원래 우리가 하나님앞에 갈 수 없는 사람인데 예수님 때문에 거듭나져서 갈 수 있는 사람이 됐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런 의미지요. 그런데 교회를 안다닌 분들은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형제님이 기도를 마친 다음에 뭐라고 마쳐야 겠는데 마칠 줄을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하면 마친건데 뭐라고 할줄을 모르니까 이 형제마음에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말하자 " 하면서 "하나님 안녕히계십시요!" 그랬다는 거지요. 일을 끝나고 나갈 때 그렇게 인사를 하지요. 하나님하고 볼일을 다봤다는 거지요. 그렇게 기도를 하고 마쳤다는 거예요. 그 기도를 들은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느 교회에 전도사님이 집회강사로 오셨어요.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되지만 "야 저 전도사님이 집회를 무사히 치를 수 있겠나?" 하는 걱정하는 마음이 된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뭐라고 기도를 했는가 하면 "하나님 우리가 돼지를 잡아 먹을 때 얼굴을 보고 잡아 먹습니까? 고기를 보고 잡아먹지. 그렇듯이 우리가 저 전도사님을 보지 않고 저 전도사님의 안에 있는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부탁드립니다."하면서 그런 기도를 한거예요. 미국 산호세에 계시는 최목사님이 그러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하면 오늘 열왕기하 5장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앞에 은혜를 입어야 될 사람들 아닙니까? 그렇지요. 은혜를 안입고도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내가 "은혜" 라고 말을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분에 이미 은혜를 입고 있어요. 햇볕이 내려 쬐이는 것도 은혜고 공기를 호흡하는 것도 은혜고, 우리가 사는 것 조차가 은혜잖아요. 여러분 노력해서 삽니까? 하나님앞에 노력한다는 것은 정말 백해무익한거잖아요. 내가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호흡을 하고 삽니까? 내가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햇볕이 내려쬐서 삽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햇볕이 없고, 공기가 없으면 못사는 것이잖아요. 우리는 많은 부분에 이미 은혜를 입고 있어요. 이제 그 은혜를 우리가 발견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러면 우리가 그런 은혜를 입고 살지만 또 다른 부분에도 우리가 은혜를 입어야 됩니다. 우리가 부딛치는 일 앞에도 은혜를 입어야 되는 것이고, 우리가 자동차를 몰고 다니면서 "내가 운전을 잘하기 때문에 사고가 안난다." 그것보다가도 그 안전도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내가 안전 할 수있는 것이고... 우리는 인정을 안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당장이라도 살 수가 없는거예요. 그런데 어떤 마음이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마음이냐? 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자 사람마다 속 사정이 다 있습니다. 겉 사정이 아닌 속 사정이 다있어요. 우리의 말에도 속 사정이 있는 말이 참 많잖아요. 외국사람들에게 우리나라 말을 알아 듣도록 통역을 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말들이 있거든요.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집에 보면 많은 예화가 나오는데 그걸 영어로 번역을 할려니까 이게 너무 너무 어려운 거예요.
거기 보면 정승 딸이 사또의 집에 시집 가서 사또 생일날이 되면 동서되는 사람들의 아버지를 전부다 초청을 해서 잔치를 벌리는데 이 정승은 올 때마다 조그마한 조랑말이나 타고 오니까 동서들이 무시를 하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 여러분 아십니까?
그래서 정승 딸이
“아버지, 다음에 오실 때에는 행차를 성대히 하셔서 오십시오.”
그러니까 그 아버지가 들으니까 분위기 파악이 되잖아요.
“그래 알았다.”
하고 가서는 다음 해에 또 오시는데 보니까 그날따라 비가 오는데 그 날도 그 조랑말을 타고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딸이 아이고 머리야 하고 드러 누운 거예요. 그래서 동서는 무시를 하고... 정승은 딸이 안보이는 거예요. 일년만에 아버지가 오시면
“아버지 일년동안 편히 계셨습니까?”
하고 인사도 하고 그래야 되는데 딸이 안보이니까 그제서야 지난 해에 한 약속이 생각이 나서 주변에 앉아 있는 벼슬하는 사돈들 사이에서 “어흠!!!”하고 큰 기침을 하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그 때 이 정승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네들이 나와 이렇게 앉아 있지만 국법으로는 이렇게 못해!”
하니까 잔치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마당으로 내려 가더니 한마당 널려 있는 거예요. 그 한마당 널렸다는 것, 사람들이 비가 ? ? 쏟아지는데 한마당 널려 있는, 그걸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합니까? 영어로 표현하기가 어렵잖아요.

또 우리나라 말중엔 하지 말라는 말을 하라는 말로 강조하는 말이 있잖아요. 그걸 하라는 말로 알아 들어 버리면 영 엉뚱한 답이 오잖아요. 그런 것처럼 말에도 속 사정이 있고, 사람마다 속 사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단풍이 산마다 울긋불긋하게 들어서 불이 난 것처럼 아름답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대덕 수양관에도 가을이 되면 특별히 내장산이나 지리산 같은 곳에 단풍구경을 안가도 산에 올라 가다가 보면 단풍이 물이 들어서 보기가 참 아름답고 좋아요. 그런데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 가까이 가서 단풍이 든 잎을 하나하나 쳐다봐요. 벌레 먹지않은 단풍잎이 거의 없는 거예요. 다 벌레가 먹었다는 거예요. 예쁜 색이 있어서 단풍잎을 하나 고르려 해도 전부 다 벌레가 먹어 있으니까 예쁜 잎 하나 고르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 보여도 가까이 가서 살펴 보면 아름답지가 않다는 거예요.

자 오늘 열왕기하 5장의 말씀을 보면, 주인공의 이름이 나아만 입니다. 그래 이 사람의 이름은 나~아만 (나만)아는 사람, 자기만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아만 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군가 하니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었어요. 요즘 같으면 국방부 장관이지요. 이 군대장관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해서 이긴거예요. 군대장관이고 또 전쟁에서 이겼고 그러니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이 사람이 외형적으로 볼 때 군대장관이고 훌륭한 사람인데 여기서 한가지 덧붙여 놓은 것이 뭐냐하면, 5장 1절 끝부분을 봅시다.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그럼 큰 용사라는 것은 겉입니까? 속입니까? 이건 겉이거든요. 그렇지요. 그런데 문둥병자는 겉입니까? 속입니까? 이건 속을 가르키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 나아만 장군처럼 겉이 큰 용사인 사람이 있어요.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자이면서 외형은 전쟁에 나가서 이겼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더 존귀한 사람이 됐는데 이 사람이 집에 돌아와서 혼자만 되면 이 문둥병 때문에 고민을 하고,고통을 하고,괴로워하고 이 문둥병이 심해지면 결국은 사망이잖아요. 문둥병의 끝은 사망이니까...
그런데 이 말씀속에서 보면 전쟁하는 중에 이스라엘 나라 사람, 한 계집아이를 잡아서 온거예요. 그래서 자기의 집에 두고 아내의 수종을 하게 한거예요. 그 집의 옷도 빨고 밥도 하고 집안 청소도 하고 그랬을 건데 어느날은 이 주인의 옷을 빨다가 보니 피고름이 섞인 옷이 오는 거예요.
“틀림없이 이건 문둥병이다!”
그래서 이 계집아이가 그 나아만 장군의 아내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이 이야기를 계집아이가 나아만장군의 아내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 아내가 나아만 장군에게 하고, 그는 그나라의 왕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왕이 그럼 내가 이스라엘의 왕에게 글을 써주겠다고 해서 천거서를 써줘서 나아만 장군이 아람왕이 써 준 글을 가지고 이스라엘 나라 땅을 간거예요.
이스라엘왕이 그 글을 보니까 그 문둥병을 고쳐 주라는 거예요. 문둥병은 아무나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닌데 자기보고 고치라고 하니까 너무 억장이 무너져서 옷을 찢고 오해를 하잖아요. 아람왕이 시비를 걸어서 전쟁을 하려고 지금 내가 풀지 못하는 이런 문제를 줬다고 하면서... 그 소리를 엘리사가 들었어요. 엘리사가
“왕이시여, 왜 옷을 ?었습니까? 그 문둥병자 나아만을 내게 보내소서.”
그래서 엘리사에게 왔는데 엘리사가 종을 보내서
“너의 몸을 요단강에서 일곱번 몸을 ?으라. 그러면 네가 깨끗하게 되리라.”
고 했는데 나아만 장군은 화를 내면서 돌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이 나아만 장군은 은혜를 입어서 문둥병을 고쳐야 되잖아요. 그러면 문둥병을 고치러 갈 때, 즉 은혜를 입으러 갈 때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되느냐?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왕하 5:11절)
자! 여기 몸을 돌이켜 떠난다고 되어 있는데 떠난다는 것은 은혜와 멀어진다는 것이잖아요. 그럼 왜 나아만 장군이 은혜와 멀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와 축복앞으로 이끄시려고 하시는데 나아만 장군은 여기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분한 모양으로 떠나면 어떻게 돼요. 죽는거잖아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분한 모양으로 떠날 때가 있더라고요. 마음에 맞지 않아서 분해하면서 이 교회를 안 나오려 한다던지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가 있잖아요. 그게 뭐냐고 하면 은혜와 멀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럼 나아만 장군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 때 은혜와 가까워지고 어떤 모습일때는 은혜와 멀어지느냐? 지금 나아만 장군의 모습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큰 용사이고 군대장관인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문둥병자이지요. 그럼 큰 용사이고 군대장관인 모습은 외형적인 거예요. 반대로 문둥병자는 속사정이잖아요. 그 안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앞에 나올 때 속의 문제를 가지고 나오지 않고 겉의 모양을 가지고 나온다는 말이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하시려는 것이지 우리의 겉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나아만 장군이 은혜를 입으려 나올때 은혜를 큰 장군에다가 입어야 되는냐? 문둥병에다가 입어야 되느냐?
큰 장군에다가는 은혜 입을 것이 없거든요. 큰 용사인데요 뭐... 그럼 문둥병에다가 은혜를 입어야 되니까 문둥병자의 모습으로 나와야 되잖아요. 문둥병자인 것 만을 들고 나와야 되거든요.
우리는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으려 할 때 자꾸 외형적인 것을 들고 나온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외형적인 것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돌아보게 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상관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내 영혼의 모습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느냐? 내 영혼의 모습은 문둥병이 들어서 나아만처럼 말할 수 없이 황폐해서 살이 썩고, 코가 짜부러 들고 온 손가락이 툭 툭 떨어져 나가고 있는데 군대장관이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큰 용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예요.
그럼 나아만 장군이 은혜를 입어야 될 부분이 다른 부분이 아니고 문둥병이라는 곳에 은혜를 입어야 되는 것이예요. 그런데 이 문둥병이란 것을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고 큰 장군, 군대 장관이란 것을 가지고 나온거예요, 용사라는 것을 가지고 나온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 내 영혼의 모습을 가지고 나가 본 적이 있느냐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앞에 내 형편의 모습을 가지고 나간다는 거예요.

저는 일본에는 가보지 않았지만 오오사카라는 도시에 가면, 일본 그 잘사는 나라에 뭐 거지가 그렇게 많냐 싶어도, 큰 도시인데 거지가 그렇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아프라카 우간다라는 나라에는 거리에 불량자라던가 거지들이 없데요. 왜 그런가 하면 그나라 옛날 대통령중 이디아민이라는 대통령이 있었는데 이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에 방을 붙였어요. “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국민들을 위해서 뭘 좀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우리나라에 있는 거지, 부랑아들은 몇년 몇월 몇일에 대통령궁 앞에 모여라. 내가 이들을 위해서 은혜를 베풀겠다.“그래서 그 시간에 대통령궁 앞에 모였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군용 트럭에 태워서 식인 악어들이 사는 늪에다가 다 빠트린거예요. 그래서 악어 밥을 만들어서 요즘도 그런 부랑자나 거지들이 없데요. 일본은 그런것을 안해서 그런가 거지들이 많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거지들이 거리에 널부러져서 거리에 똥도 누고 오줌도 싸고 그런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적십자 같은데서 와서 구호활동을 한다고 먹을 것도 주고, 입을 것도 주고 한데요. 그런데 너도 나도 달라고 몰려들고 그래서 나눠 줄 수가 없으니까, 먼저 그중에 몇명을 뽑아서 완장을 하나씩 채워 준다고 그러데요. 그러면 서로 먼저 타먹으려고 덤벼들던 사람이 완장을 탁 차면 위엄이 생겨서 “어이 똑바로 서! 야 거기 줄 안서!” 하고 같은 거지 주제에 완장만 채워 주면 달라진다고 그래요. 이 사람들이 완장을 탁 차면 실력을 행사하고 말 안듣는 사람이 있으면 “넌 뒤로 가!”하고.... 여러분 똑같은 거지인데 뭐 좀 채워 주거나 입혀주면 달라지는 거예요.

자! 여러분 우리 영혼을 돌아 본다는 것은 뭘 가르킴니까? 하나님 앞에 이 세상 사람들이야 다른 것이 없이 다 똑같은데, 그런데 사람에게 잘난 부분이 발견이 되고 좀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것 하나가 있으면 그걸 가지고 은혜와 가까워 지는데 쓰는 것이 아니고 은혜와 멀어지는데 쓴다는 거예요. 이 나아만장군이 엘리사에게 와서 은혜를 입는데 방해가 되는 부분이 뭐냐는 거예요. 나아만 장군이 은혜를 입는 것에 문둥병이 방해가 되요? 방해가 안되는 거예요. 그건 은혜를 입을 조건이더라고요.

진짜 은혜를 입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나아만 장군이 군대장관이라는 것, 큰 용사라는 것... 여러분 이게 그를 은혜앞에서 떠나 가게 만들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분한 모양으로 떠나게 만드는 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자이기 때문에 떠나가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앞에서 분한 모양을 왜 가지냐는 거예요. 우리가 문둥병자인 마음을 가진다면 분한 모양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요. 은혜를 입어야 되니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고, 모자라는 것이있고, 못하는 것이 있고 그러면 은혜를 입어야 되니까 그것때문엔 떠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럼 무엇 때문에 떠나갑니까. 우리에게 나아만 장군처럼 큰 용사나 장관은 아니더라도 어떤 작은 것, 스스로 용사라는 것을 입고 있으니까 그것 때문에 분한 모양으로 떠나고 있더라고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입혀 주시는 원칙이 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인데 은혜를 입혀 주시는 원칙은 우리의 부족, 우리의 못난 것, 우리의 연약한 것... 이런것들이 은혜를 입을 조건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고린도 전서 1장 26절말씀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자,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셨느냐?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지혜있는 자가 혹 있을 수 있다는 거지요. 많지 아니하다고 하셨으니까 지혜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또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능한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문벌이 좋은 사람이 안 많아요. 그럼 왜 문벌이 좋지 않은 사람을 부르고, 지혜가 없고 능하지 못한 사람을 부르냐는 것입니다. 여기 보니까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그랬으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이잖아요. 하나님의 권한에 있는 것이거든요. 그럼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지혜있는 자보다가 지혜가 없는 사람을 부르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는 능한 자보다 능하지 못한 사람을 부른다는 거예요. 자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는 문벌이 좋은 자보다 별로 문벌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부르신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 하려 하시나니 (고전 1:27-28)

자 여기는 하나님의 권한으로 어떤 사람을 택하느냐? 미련한 사람을 택하고 약한 것을 택하고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신다고 그러셨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자 29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자 이게 이유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니라.”그럼 어떤 사람이 은혜와 가깝고 어떤이는 은혜와 먼 가를 이 한마디 말씀으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럼 육체를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일수록 은혜와 가깝습니까? 은혜와 멀어집니까? 육체를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하고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럼 나아만 장군이 분한 모양으로 떠난다는 것은 은혜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은혜와 멀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까? 그 사람은 육체를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이예요. 육체를... 자 설령 내가 육체를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육체가 무엇이 자랑거리라는 것입니까? 이 육체에다가 대통령을 턱 입혀 놓으면 대통령이 자랑거리입니까? 그 인생이 대통령입니까? 대통령이란 옷을 입혀 놓은거지! 그 옷은 벗을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군대장관을 입혀 놓으면 그 인생이 군대장관입니까? 그 군대장관 옷을 벗을 건데. 그거는 벗을 것이잖아요. 이것은 옷이란 말입니다. 육체에 입혀지는 모든 것은 옷일 뿐이예요. 여러분 왜 옷을 자랑하고 있느냐는 거예요.
자 내가 이렇게 잘난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다. 내가 군대 장관이다, 용사다. 여러분 그런 것은 옷이란 말입니다. 그 옷은 벗어 버릴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일수록,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는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냐는 거예요. 우리는 육체를 자랑할 것이 있는것 처럼 생각하면서 육체를 자랑할 것을 자꾸 찾고 있다는 거예요. 육체를 자랑할 것을 자꾸 덮어쓰고 있지 않냐는 거예요. 그건 덮어 쓰면 쓸수록 하나님의 은혜와는 자꾸 멀어진다는 거예요.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육체를 자랑할만한 것이 있을수록 하나님과는 점점 더 멀어진다는 거예요.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 1:31)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고 주 안에서 자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주안에서 자랑하는 사람은 원래는 지혜가 없었는데 주님안에 들어와서 지혜를 가지게 된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내가 원래는 미련한 사람인데 주님안에 들어 와서 지혜로운 자가 된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내가 원래는 약한 자인데 주님안에 들어와서 내가 강한 자가 된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그건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거든요.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은혜란 말입니다. 은혜는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은혜는 나의 노력이나 수고나 열심이 없이 거저 주는 것이 은혜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얻은 것이나 받은 것이 아닌 내 스스로를 자꾸 자랑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육체를 자랑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분명히 문둥병 하나만을 가지고 왔다면 분한 모양으로 떠날 일이 있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제가 할 일이 요단강에 일곱번 목욕 할 일 밖에 없습니까? 뭐 더할 일이 있으면 가르켜 주십시오. 아! 그거만 하면 됩니까! 알겠습니다."
하고는 순식간에 쫓아가서 풍덩 풍덩 풍덩 일곱번 목욕을 할거 아니겠습니까.
"뭐 제가 칠십번이라도 하겠습니다."하고 더 하라 그래도 했겠습니까? 안했겠습니까?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외형적으로 입혀 놓은 군대장관, 용사라는 그 옷이 은혜를 입는데 큰 거추장거리가 되고 걸림돌이 됐잖아요. 하마터면 나아만이 문둥병으로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위치에 갈 뻔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을 살펴봐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갈 때 뭘 들고 나가야 될거냐? 내 속 모양을 들고 나가면 언제든지 하나님앞에 은혜를 입을 수 있어요. 내 영혼의 모양을 들고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 마다 진짜 마음이 낮아질 수 밖에 없고, 그 하나님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릅을 꿇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을 들고 하나님앞에 나가려고 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외형의 모양을 들고 하나님앞에 나가려고 한다는 거예요.

이제 외형적인 모양을 전부 벗어버리고(이건 언젠가는 벗어 버릴 거니까.) 내가 잘났으면 잘난것도 벗어버리고, 훌륭하면 훌륭한 것도 벗어 버리고, 용사면 용사도 벗어버리고... 벗어 버려야 되잖아요. 그렇게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영혼의 모습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면 어떤 사람이 은혜를 못입겠느냐는 거예요. 그영혼의 모양을 들고 하나님앞에 나아가면 진짜 낮아질 수 밖에 없어요. 문둥병 만을 들고 나아가면 감히 어떻게 높고 교만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어요. 그것 문둥병 하나만 들고 가면 이제 죽음앞에 선 사람인데....

우리가 세상의 사람을 볼 때도 무엇을 보느냐는 거예요. 돈 좀 있고 좋은 집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보고 부러워 합니까? 그게 무슨 그리스도인이냐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은 겉을 보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저가 저렇게 떵떵거리며 살아도 그 속은 문둥병자라서 너무 너무 불쌍하다는 것을 봐야 돼잖아요.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왕하 5:9)
10절에 "엘리사가 그에게 나아가서 오 그대가 나아만 장군입니까 잘 오셨습니다."하고 그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기도 했습니까?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집 앞에 왔는데 엘리사 직접 나가지 않고 사자를 보냈어요.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으라 네 살이 깨끗하여 여전하리라.
이 말 버릇 좀 봐요! 말 버릇... 군대 장관 앞에서 말을 이렇게 하면 됩니까? 엘리사가 직접 나오지 않고 사자를 보내면 됩니까? 안되잖아요. 만약 나아만이 군대장관인 것을 인정했다면 엘리사가 직접 나와야지. 그런데 엘리사는 속된 말로 콧빼기도 안보여요. 그런데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말을 이렇게 하면 안되지요. "그대가 나아만 장군이십니까? 장군님 요단강에 가셔서 몸을 일곱번을 ?으라십니다. 그런면 당신의 몸이 깨끗하여 어린이의 살과 같아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존댓말을 써야되지 반말로 ?으라 깨끗하리라, 이런 말 버릇이 형편없잖아요. 군대장관에게... 이걸 보면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을 군대장관, 큰 용사 같은 것이 안중에 있어요? 없지요. 나아만 장군을 엘리사가 볼 때 이 나아만은 장군이 아니고 문둥이인거예요. 문둥이...

여러분 엘리사가 보는 것처럼 우리가 봐야 되는 거예요.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을 볼 때 장군으로 봤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볼때는 어떻게 보느냐는 거예요. 우리는 정말 세상의 사람들이 권세나 명예나 재물같은 것으로 옷을 해 입고 있는 사람을 볼 때 큰 장군으로 보고 있으니까 그걸 부러워하고 있지 않느냐는 거예요. 뭐가 그것이 부럽냐는 거예요. 나아만이 큰 장군인 것이 부럽습니까? 그건 하나도 부럽지가 않은거예요. 그는 문둥병자이기 때문에 오직 불쌍한 것 밖에는 없는거예요.
여러분 구속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보면서 세상을 따라하지 못해서 부러워하고 따라 할려고 애쓰는 그런 사람들을 본다면 정말 뭔가 잘못됐잖아요. 좋은 차를 타는 것이 부럽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부럽냐는 거예요. 그건 다 옷이예요. 옷! 그런 것은 모두 다 벗어 버릴 것이라는 거지요. 사람들은 속을 볼 눈이 없으니까 겉만 보잖아요. 겉이 훌륭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거예요. 이 엘리사는 나아만을 볼 때 군대장관으로 보지 않았어요. 왜? 그를 군대장관으로 인정하면 그의 문둥병을 고칠 수 있습니까? 그를 큰 용사로 인정을 하면 문둥병을 고칠 수 있습니까? 없어요. 없어.

어느 목사님 아버님이 위암이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가족들이 쉬쉬 하면서 병을 알리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아버지는 가족들을 모아놓고는 "애들아 내가 빨리 병이 나아서 우리 새 집을 짓고 오손도손 살자." 하면서 위암에 걸려서 죽어 가는 줄은 모르고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예요. 사람들은 죽을 때 죽더라도 마음을 안 상하게 하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속의 영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니까 아들되는 목사님은 아버지가 이대로 가시다가는 지옥에 가겠거든요. 그래서
"아버지!!! 새 집은 무슨 새 집이예요. 의사가 그러는데 아버지는 암에 걸린거예요. 암! 위암에 걸려서 아버지 얼마 못사신대요."
그러자 구원을 받지않은 가족들이 쉬쉬 하다가 너 무슨 말이냐고 하면서 입을 막고 그랬는데 치우라고 하면서 바른 말을 했지요. 이젠 몇일 못사신다, 정신차리시라고, 그건 꿈이라고...그러자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침상에 푹 쓰러진 다음에 마음이 낮아져 가지고 그 시간부터 계속해서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고 얼마 안되어서 돌아가셨거든요.

정말 우리가 돌아보아야 될 것은 영혼이지 육체겠냐는 거예요.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을 볼 때에 장군으로 본 것이 아니예요. 문둥이로만 봤다는 것이죠.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가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는 눈은 엘리사의 눈으로 봐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영혼의 눈을 가지고 봐야 되는데 영혼의 눈으로 보지 않고 외형적인 육신의 눈으로 껍데기를 보고 있는거예요. 나오는 사람도 껍데기를 덮어쓰고 나오니까 은혜에서 멀어지려고 그러고 또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껍데기를 보고 판단하는 거예요. 껍데기가 군대장관이면 그 사람이 군대장관이고 껍데기가 큰 용사이면 그사람이 큰 용사입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이 사람을 그냥 군대장관으로만 인정을 해 준다면 이사람은 멸망인거예요. 이사람을 그냥 큰 용사라고만 한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문둥병에서 나을 수가 있겠느냐는 거예요.

박옥수 목사님이 집회를 하실 때 마다 하시는 말씀이, 목사나 집사, 권사들도 오고 그러면 "목사는 죄사함 못받아요. 집사나 권사도 죄사함을 못 받아요." 하시는데 그렇지요. 목사, 권사, 집사는 죄사함을 못받지요. 그러면 누가 죄사함을 받느냐? 죄인이 죄사함을 받지... 성경에 목사가 죄사함을 받은 적이 있어요? 장로가 죄사함 받은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 외모에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 외모에 먹고 입고 사는 것에, 육체에 연연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결국 불쌍한 사람이 되잖아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요.(계 3:14-18)

여기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시지요. 17절에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이건 외형적인 부분에서는 맞을겁니다. 그런데 그 영혼의 모양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영혼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모양이지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의 모습이 아니냐는 거예요. 내 영혼의 모습은 어떠냐는 거예요. 내 영혼은 곤고하지 않느냐는 거지요. 가련하고 눈 멀고 벌거벗어 있는데 그 영혼의 모습에는 우리가 관심이 없는 거예요.
자 나아만이란 사람이 장군이란 모습을 들고 나가면 은혜와 멀어 지더라고요. 그런데 문둥병을 들고 나가면 은혜를 입게 되고... 나아만이 언제 말씀에 순종을 하는가 하면 장군의 마음을 가진 때가 아니더라고요. 장군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분한 마음을 가지고 떠나게 되더라고요. 그 마음을 가지면 분한 마음으로 떠날 수 밖에 없어요.

내가 하나님을 섬겨 사는데 어떤 마음으로 섬겨야 됩니까? 문둥병자의 마음을 가지니까 말씀에 순종을 하게 되더라고요.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장군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거예요. 무엇이 하나님앞에서 장군입니까? 그 장군이 그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다 자신의 잘난 부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지 않잖아요. 어떤 사람이 말씀에 순종을 하지 않습니까? 문둥병자라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앞에 낮아져 있다면 순종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장군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순종을 하려 해도 안되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이 열왕기하 5장 말씀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마다 이 하나님의 말씀앞에 넘어야 될 산이 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 산이 굉장히 높은 산이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낮은 산이 된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번 ?으라고 하니까 노하여 물러가면서 "내 생각에는..." 하면서 자기의 생각이 나오더라고요. 물론 자기의 생각이 나와야 되지요. 그 생각이 나와서 그 생각이 무너지고, 깨트려지고, 부인되고 그런 다음에 말씀에 순종이 되어야 되는데 어떤 이에게는 이 생각의 산이 굉장히 높고 어떤 이는 낮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장군의 생각을 가지고 온 사람은 이 산이 굉장히 높아요. 넘어가지를 못하는거예요. 그러니까 떠나잖아요.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러 ?어 깨끗하라 함 이리이까. "

자 이종들이 한 이야기를 들어 볼때 이 종들이 엘리사가 한 이야기를 순종하고 따르는 것은 너무 너무 쉽다는 것이잖아요. 요단강에 들어가는 것이 뭐가 어려우냐? 당신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 방법말고 더 어려운 방법도 했었지 않느냐? 그리고 선지자가 더 어려운 방법을 하라고 그러면 안하겠느냐? 하물며 이건 더 쉬운 방법인데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으라는 것이 뭐가 어려우냐? 종들의 마음에는 이것이 너무 쉽잖아요. 우리들에게 뭣인가 하나 턱 씌워 놓으면 생각의 산이 자꾸 높아져요.

내가 목사다 싶으면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데도 "목사"하면 화장실을 청소하기가 쉽지가 않은 거예요. 군대에서 화장실 청소를 장교가 하기 쉽습니까? 방위가 하기 쉽습니까? 방위가 훨씬 하기가 쉽지요. 방위는 으례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군대에서야 방위니 장교니 하사관이니 하는 것이 계급이라고 하겠지만 이 목사라는 것은 벼슬이 아니잖아요. 이건 은사지... 그런데 목사라는 것을 하나 씌워 놓으면 이게 마치 벼슬인것 처럼 자기는 일을 안하고 다른 사람을 부리려고만 하잖아요. 이건 부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교회안에 직분자들을 세워 놓으면 이것이 다른 사람을 부리라고 직분을 세우냐는 거예요. 그건 교회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봉사하고, 마음을 같이 연합하고 하기 위하여 직분을 세우는 것이지... 자 우리에게 마치 옷을 하나 입히듯이 무엇을 하나 턱 씌워 놓으면 사람들이 속 모습을 잊어 버리는 거예요.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미갈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생명을 가지고 가서 이 미갈과 결혼을 했어요. 이건 생명의 댓가 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어 하나님의 괘를 가지고 궁에 들어 올 때 미갈이 창문을 열고 보면서 판단을 하고 있는거예요. 업신여기고 있는 거지요. 이 미갈은 정말 뭘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미갈은 겉은 공주였어요. 또 겉은 다윗의 아내이기 때문에 왕비가 ?잖아요. 그럼 속은 다윗이 사울에게 좇겨서 광야에서 유랑과 방랑생활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이 미갈을 발디엘라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시켰어요. 그럼 이 미갈은 음부잖아요. 남편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허락도 없이... 속은 음부란 말이지요. 그럼 미갈이 자기의 속을 봤다면 감히 다윗을 업신여길 수가 있어요. "아 정말 내가 다윗과 함께 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내가 저 다윗의 아내가 되었었는데 정조를 지키지 못한 이런 형편없는 여자가 되었구나."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다윗앞에 나아가서 은혜를 입으려고 했겠지요.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삼하 6:20)

다윗이 이스라엘사람에게 축복하고 그들에게 떡 한개, 고기조각,건포도 하나씩을 나눠주고 백성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후에 자기의 가족들을 축복하려고 돌아왔어요. 그러면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먼저 찾은 미갈도 자기의 가족으로 여기잖아요. 자기의 아내니까...그런데 미갈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삼하 6:20)

하고 조롱하고 있는거예요. 다윗은 지금 가족을 축복을 하려고 들어왔는데 미갈은 다윗을 조롱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미갈은 지금 뭘 모르고 있습니까? 자기를 모르잖아요. 자기의 속 모습을... 정말 자기는 다윗이 살아 있는데도 발디엘에게 시집을 가서 음부가 된 사실을 알면 다윗에게 넙죽 엎드려 가지고
"다윗이여 제가 당신을 따르지 않아서 음부가 되었는데 저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요."
하고 자신의 속 모습을 보고 마음을 낮추었다면 그가 자식이 없이 지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삼하 6:23)

자신의 영혼의 모습을 모르니까 영혼의 생명을 얻을 수가 없고 또 은혜를 입을 수가 없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덮어 씌어놓은 옷을 입고 나아가길 원치 않으셔요. 정말 내 영혼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라오디게아교회처럼 헐벗고 가난하고 수치스럽고 그런 내 자신의 모습을 자주 자주 발견을 해서 내 영혼의 모습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분한 모양으로 떠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왜 분한 모양으로 떠납니까? 장군의 모양으로 나가니까 그런 모양으로 떠나지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언제 분합니까. 내 마음이 잘난 마음과 장군의 마음으로 높으니까 분해지지요. 그렇지요. 오해스러운 말을 들었을 때 신경질을 내고 짜증을 내고 울그락 불그락 하는것은 나는 저런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지요.
여러분 사람이 뭐 그렇게 결백하냐는 거예요. 우리는 결백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털어서 먼지 안날 사람이 있어요. "다 들켰으니 도망하시요."하면 뒤가 하나도 안구린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다 숨기고 싶고,감추고 싶은 일 있잖아요.

그런 부분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영혼의 속 모습을 들고 하나님앞에 나아간다면 우리의 마음이 낮아 있는 마음이 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이 흐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기를 원하셔요. 엘리사에게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아만 장군에게 흘러가고 싶은데 나아만 장군에게는 안 흘러가는거예요. 왜? 장군이라는 것이 탁 막고 있잖아요. 무엇이던지 훌륭하고 잘난 것에 마음이 있으면 이게 흐름이 막혀버리더라고요. 왜그럽니까? 잘난 마음이 있으니까 흐름이 막히지.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왕하 7:16-17)

지금 사마리아 성밖, 아람진에 큰 양식이 생겼어요.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향해 흘러 가려는데 장군이 "못가!"하고 지키고 있는거예요. 역사를 향해 흘러가려는 마음을 장군이 막고 있잖아요. 장군이 백성이 성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못하게 지키고 있는데 이 장군이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이건 죽어야 되지요. 항상 이 흐름이 막히는 것은 잘난 마음에서 흐름이 막혀요. 형제, 자매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음이 막히는 것은 왜냐하면 내가 장군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안흐르는 것이지 내마음을 낮추어 있으면 누구와든지 흐르지 않냐는 거지요.물이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듯이 내마음이 낮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와도 교제가 되고 통하고 흘러갈것 아닙니까.

엘리사에게 있는 생명이 나아만에게 흘러 갈려고 있는데 자칫 못흘러갈뻔 한거예요. 왜? 장군의 마음을 가졌으니까... 흘러가야 되잖아요. 사람들은 종교라는 옷을 입고 있으니까 생명과 능력이 안흘러간다는 말입니다. 능력은 어떤 사람에게 흐릅니까. 부족하고 못나고 연약하고 형편없는 그 마음에 흘러간다는 말이지요. 바울도 육체적으로는 자랑할만한 훌륭한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를 통하여 안나타날까봐, 흘러가지 않을까봐 걱정하고 염려하는 중에 그래 내가 육체의 잘난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고는 버려 버리더라고요. 그리고 바울에게 연약한 것을 두었는데 육체의 가시를 뒀잖아요. 바울은 그 가시를 뺄려고 하나님앞에 세번이나 동일한 말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이야기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19)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약한데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한데 하나님의 능력이 머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입으려고 하면 우리의 약한 모습이 자주 자주 발견해야 하고 우리의 영혼의 모습을 발견할 때 은혜를 입으려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정말 그 잘낫다는 것을 좀 버려야 해요. 장군도 벗고 군대장관 그것도 벗고... 그런것은 우리가 잠시 잠깐 입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겉사람을 들고 나아가면 우리는 점점 은혜와 멀어집니다. 우리의 속 사람의 모양, 우리의 영혼의 모습을 들고 나가면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앞에 구로 할 수 밖에 없고, 무릅을 끓지 않을 수가 없으며 주의 은혜를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Reply 윗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3개월이 지난 글은 덧글 입력이 불가 합니다.
카카오톡 공유하기 URL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