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9일 영상교제 말씀

"어떠한 주님을 우리가 바라보느냐"




오늘 저녁에는 마가복음 9장에 있는 말씀을 읽겠습니다. 2절부터 5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니다.`하니"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옛날에 어느 정승이 지방에 볼일이 있어서 내려갔어요. 정승이라고 하면 어마어마하게 높은 벼슬을 가진 사람인데, 초라하게 시골 노인처럼 행색을 차려서 시골의 조그마한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날 그 방에 같이 자게 된 젊은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정승이 이 선비를 보니까, 정승인 줄은 모르는 거죠. 무시하는 태도로 그렇게 대했어요. 정승이 말하기를, `우리 잠자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서 심심한데, 말놀이를 하자.` 아 그러자고, 무슨 말놀이를 했으면 좋겠느냐고. `공당 놀이`를 하자는 거지요. `공당 놀이가 뭐냐` `내가 말할 때 공이란 말로 물으면 당신은 당이란 말로 대답을 하라`는 거예요. 그러자고.

"어디를 가는 공?" 하고 정승이 공으로 물었거든요. "한양엘 간당."하고 당으로 대답한 거예요.
"뭣하러 가는 공?"
"벼슬하러 간당."
"내가 벼슬을 시켜 줄공?"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당." 하고 말을 끝냈어요.

그래서 그날 밤 같이 자고 그 이튿날 각자 길을 갔는데, 이 사람이 이제 시험을 쳐서 벼슬에 된 거예요. 정승 앞에 인사를 하러 나타났는데 보니 그 사람이거든요. 정승이 보고,
"나를 알아보겠는공?"
"죽여주사이당."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승이지만 이 사람이 정승의 참된 모습을 모르고 그냥 시시한 시골 촌노로 알았을 때, 이 선비가 참 무시를 했는데, 정승의 참 모습 보고 얼마나 두려웠겠느냐는 거지요.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33년 동안 사신 동안 참 여러 가지 모습을 하셨어요. 주님은 베들레헴에 아주 연약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열 두 살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고, 잘 아시는대로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들을 불러다 놓고 말씀을 전하시고, 갈릴리 바다에서 말씀을 전하시다가 주님이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오셨을 때에 그 도시에 화려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주님의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겠느냐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도 우리가 주님을 볼 때, 성경을 통해 주님을 발견하고 생활 속에서 주님을 느끼고 합니다만, `어떠한 주님을 우리가 바라보느냐` 하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라는 거지요.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보면, 지금까지 늘 같이 다닐 때, 베드로가 보았던 예수님, 야보보나 요한이 보았던 예수님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런 예수님을 본 거예요. 안 그렇겠습니까?

여러분 갈릴리에서 주님이 자라셔서 처음 예루살렘에 올라오셨는데,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오셨을 때 누가 주님을 영접했습니까? 그냥 갈릴리 바닷가에서 데려 다니던 제자들 몇 명 데리고 왔는데, 주님이 정말 거할 만한 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낮에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해가 지면 다 집으로 가는데, 주님은 집이 없으니까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그냥 나무 밑에서 기도하다가 쓰러져 주무시고, 그 이튿날 아침에 다시 성전에 와서 가르치시고. 그러니까 단벌 옷 입으시고 단벌 신발 신으셨으니 그 옷을 자주 세탁이나 했겠습니까? 따뜻하고 깨끗한데 거하셨겠습니까?

제자들이 보았을 때, 그냥 말씀에 매료되고 말씀이 은혜로와 따라다니긴 했지만 예수님의 그러한 부분만 보아오다가 어느 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 올라가서 전혀 다른 모양의 주님을 보고 이 제자들이 깜짝 놀라고 정말 놀라는 거지요.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겠다`고 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잘나고 똑똑하고 위대한 사람 많이 보는데, 나는 오늘 우리 동역자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났지요. 어떤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정말 여러분 참 영광스럽고 찬란한 그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 예수님 앞에 우리가 고개가 숙여지고, 그 예수님의 기쁨을 위해 우리가 슬픔을 당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고, 그렇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정말 나사렛 초라한 예수를 보고 무시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업신여겨서 내 욕망과 내 생각을 내세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세상 사람도 아무리 하고 싶고, 즐기고 싶어도 위대하고 휼륭한 분 앞에서는 조심하고 자제를 하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우리가 믿는 그 예수님은,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똑같은 예수님이지만, 사람들마다 각각 다르게 그 예수님이 비추어 졌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정말 십자가를 지고 간 초라한 예수님,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피곤에 지쳐있는 그런 예수님, 그 고물에 배를 베고 주무시던 예수님, 아니면 빌라도에게 묶여서 죄수의 위치에 서신 예수님,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던 예수님, 이 성경 속에는 예수님이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고 있는데, 정말 여러분의 눈에 비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었습니까?

여러분이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여러분의 욕구나 정욕이나 모든 걸 자제하면서, 그 분 앞에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그 영광스러운 주님으로 여러분 앞에 주님이 비추어 졌느냐는 거지요. 그렇게 비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의 초라한 예수님으로 바라보며 그를 섬기기란 상당히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주님으로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여러분을 세우시고 여러분을 능히 바꾸어 주실 그 예수님으로 여러분 마음에 비추어 진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달라질 줄로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지금까지 보던 예수님과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그 영광스런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도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여러분의 모든 욕구를 죽이고, 그분만을 기쁘시게, 그분만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을 섬기는 그런 여러분이 되신다면 얼마나 복될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여러분 우리 함께 영광스런 주님을 모시고 정말 기쁨으로 그를 섬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여기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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