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에서 " 하나의 초가 녹아 주위를 밝히듯이....."
가나 캄프교회, 고 임마누엘형제의 장례식에 다녀와서.

우리는 가나에서도 조그만 시골, 떼떼(Tetteh)목사님이 시무하는 캄프(Camp)라는 곳에서 어젯밤을 보내고, 오늘 아침까지 고 임마누엘(Emmanuel)형제의 장례식을 마치고 테마로 돌아왔다. 1996년, 우리가 가나에 오던 다음해 초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임마누엘은 앗사리(Asare)형제의 전도로 우리와 만나게 되었고, 여러 번의 복음교제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는 구원을 받고 나서 주일날 아침 테마교회에서 간증과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후, 그때 그가 불렀던 찬송이 너무 복음 적이고 은혜로워서 가사를 받아 적으며 따라서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때의 그의 밝은 얼굴, 그 찬송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집회 때마다 그 형제를 초청해서 그 찬송을 즐겨 불렀고, 자연스럽게 그 찬송은 가나교회에 유명 찬송가가 되었고, 그 형제의 상징이 되었다.
1절: "Jesus Christ died for me. He carried my sins away. He died on the cross to save my soul. He carried my sins away. He carried my sins away. He carried my sorrows away. He died on the cross to save my soul. He carried my sins away."
2절: "I will not let Him down. I follow Him to the end. My Lord Jesus in Him I trust. I follow Him to the end. I follow Him to the end. I follow Him to the end. My Lord Jesus in Him I trust. I follow Him to the end."
1절: 예수님! 나 위해 죽으셨네. 내 모든 죄 짐을 지셨네. 십자가에서 날 구했네. 내 모든 죄 짐을 지셨네. 내 모든 죄 짐을 지셨네. 내 슬픔도 지시었네. 십자가에서 날 구했네. 내 모든 죄 짐을 지셨네."
2절: 나는 주님과 함께 있네. 나는 주님을 따르리. 내 주 예수 믿음으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리. 나는 주님을 따르리. 나는 주님을 따르리. 내 주 예수 믿음으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리.

15년 동안, 오순절 교회에 다니면서, 장로까지 되었던 그는 구원을 받자마자, 곧 바로, 그의 다녔던 교회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겨우 선교학교를 시작한 단계였는데, 다만 그가 가끔이라도 말씀을 들으러 왔으면 했다. 그 형제가 사는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테마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조그만 산골마을이었다. 그는 매 집회 때마다 참석하여 말씀을 달게 들었고, 올 때마다 한두 명씩 새로운 사람들을 데리고 왔으며, 돌아가서는 계속 복음을 전했다. 이후 그는 성경적인 복음이 없는 그 교회에서 나왔고, 그때 그 형제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던 그 교회의 반정도인 30여명이 임마누엘형제를 따라 우리 기쁜소식선교회(GOOD NEWS MISSION) 캄프교회가 세워졌다. 그 동네는 모두 흙집으로 되어있다. 마치 영화제작 쎄트장처럼, 오밀조밀 작은 흙집들이 있다.(참조; 기쁜소식지 2000년 3월호 표지 에 실린 마을 사진) 그는 자기 집 흙벽 위에, 우리 집회 포스터나 수양회 포스터를 늘 붙여놓고 작은 앞마당에는 코코넛 잎을 엮어서, 그런 대로 시원한 그늘 터를 만들고, 또 대나무로 긴 의자 네댓 개를 만들어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캄프교회(현재 떼떼 목사 시무)의 시작이었다. 전도집회차 가끔 그곳에 가보면 색이 다 바래버린 지나간 수양회 포스터를 아까워서 떼지 못하고 해가 바뀌어도 그대로 붙여놓아 마치 교회의 상징간판처럼 되어 있었다. 우리가 갈 때마다 그는 가끔 염소를 잡아주면서, 레위기 4장의 속죄제사를 설교하곤 했었다. 수양회 때마다 30여명의 형제 자매들을 미니 버스를 대절해서 인도해 오곤 했는데, 떼떼목사님이 그 곳에 파송된 후, 한번은 수양회 때에 그곳에서 18명만 참석하여 의아해서 물었더니 그 동안 그 형제가 어려운 사람들의 차비와 회비를 대신 담당해 왔었다는 것이다. 그에게도 아이들이 많고 시골살림에 물질이 궁색했을 텐데, 내색치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복음을 섬겼던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전도자와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섬겼고, 그 형제로는 교통비의 큰 부담을 불구하고, 가끔 테마에 와서 선교학교 수업도 참석하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자기는 더 이상 형제 자매들을 이끌 수 없으니, 선교학교에서 정식으로 훈련받은 하나님의 종을 보내 달라고 여러 번 요청해 왔다. 그는 한동안 수양회 때마다, 복음 반에서 가나의 부족어(튜이어) 통역도 했었는데, 서툰 우리의 영어와 상관없이, 마음을 받아서 힘있게 통역을 해주어, 전도자들마다 그 형제를 귀히 여겼다. 그는 전도자로 세움을 입지는 않았지만, 산골 마을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핍박과 비난의 손가락질도 받았다. 뒤에서 백인이 그를 조종하고 있고, 돈을 먹고 일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도 많았고, 그를 통해 복음을 들은 형제 자매들은 가족들로부터 많은 오해와 대적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런 형편을 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는 많은 어려움이나, 외로움도 이겼고, 어떤 불평조차 하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섬겼다. 그의 삶을 지켜보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그 형제를 지키시고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그 형제에게 선교학교에 들어 올 것을 제안할 때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나중에 ... 지금은 말고... 나중에..." ,형편이 좀 정리되면 자신도 선교학교에 들어올 것이고, 평생을 복음을 위해 살고 싶다고 여러 번 간증했다. 지금의 반슨(Banson- 현재 스웨드루`Swedru` 교회 시무)목사님 부부는 임마누엘형제 바로 옆집에 살았었는데, 그들 부부가 임마누엘형제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이후, 지금의 반슨목사님 부부는 자신들이 살고 있던 집을 언제라도 교회가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드리고 선교학교에 들어왔다. 지금은 떼떼목사님이 그집을 교회와 사택으로 쓰고 있다. 반슨목사님 부부가 선교학교에 들어 올 때, 그 아내 쥴리아나(Juliana)자매는 선교학교입학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짐을 챙겨서 마을을 나오다가 신작로에 주저앉아 짐 보따리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고 있었는데, 그 때 임마누엘형제가 뒤 따라와서 "무얼 그렇게 부담스러워 하느냐, 하나님이 다 해 주실 텐데, 네가 이렇게 귀한 복음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냐!" 하면서 그 자매를 우는 아이 달래듯 한참을 달래 주면서 짐 보따리를 차에 실어 주고 테마 선교학교로 보냈었다. 특히 이곳 대부분의 시골 사람들은 문맹인들이 많아, 성경을 읽을 수 없어서, 교회의 목사가 하는 설교가 말씀의 전부인데, 거의 대부분의 목사들이 미신 적으로 복 받는 부분을 가르치고 있었고, 구원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예를 들면, 죄를 씻기 위해, 숲에 들어가서 목욕재개 하고, 기도하는 자들도 있고, 성수(교회에서 주는 물)를 받고 가던 어떤 소년이 길 바닥에 넘어지면서 그 성수만을 안 놓치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끝내 길바닥에 다 쏟아버려 "이제 나는 죄 씻을 길이 없다며" 땅바닥을 치고 통곡했다는 이야기며, 복음에 무지했던 많은 영혼들이 허무 맹랑한 속임수에 빠져있던 중에, 임마누엘형제를 통하여 올바른 말씀을 근거로 복음이 또렷하게 증거 되기 시작했는데, 이 복음은 그들에게 충격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는데, 그의 큰 형님인 아사모아(Asamoah)형제는 구원을 받아 지금 아콰톤부라 정글에서 코코아 농장을 하며 아콰톤부라 정글교회에서 복음을 섬기고 있고, 셋째 형님인 에드윈(Edwin)형제는 캄프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으며, 그 외에도 그의 자녀들과 친척들 모두 13여명되는 형제 자매들이 곳곳의 우리 교회 안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다. 3년전, 박옥수목사님이 가나에 오셨을 때 목사안수식이 있었다. 그 후로 떼떼 목사님이 이곳 캄프로 파송 받았고 지금의 반슨 목사님이 살던 흙집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임마누엘형제가 떼떼목사님을 도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그런 모습은 우리가 보기에 참 좋았고 감사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수양회 때나 그곳을 방문했을 때 임마누엘형제를 잘 볼 수가 없었다. 떼떼목사님께 물어보아도 그도 역시 최근에는 임마누엘형제을 볼 수 없다고 했고, 가끔 일요일 낮 예배만 참석하고, 평일에는 아침 일찍 인근 도시로 택시 운전하러 나갔다가 밤늦게나 돌아온다고 했다, 겨우 밭을 일구어서 옥수수나 카사바(만주오카)를 심어 먹는 형편이었는데, 택시 운전을 해서 가족들을 돌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에 늘 걸리는 것은 5명의 어린 자식들의 양육문제이었다. 18세인 첫째 딸로 시작하여 2살 막내아들까지 5명의 아이들이 임마누엘형제에게 늘 장벽이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정을 이끌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 생각에 갇혀서 종들의 교제나 교회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점점 형편의 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주님이 주셨던 복음을 향한 귀한 마음을 점점 잃어버리고 살았다. 심지어 나중에는 떼떼목사님의 권면과 교제를 무시하고, 전도자들이 교제를 하면 오히려 반발하는 마음을 가졌다. 형제의 그런 삶을 보면서, 그 형제가 다시 복음을 향해서 마음이 돌이켜 지기를 우리 모두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난달, 가나 대학교 후속집회를 하고 있던 중에, 우리는 긴급한 전화를 받게 되었다. 떼떼목사님으로부터 온 전화였는데, 지금 임마누엘형제가 갑자기 코포리두아(Koforidua-캄프의 인근도시) 중앙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였고, 조금 전에는 많은 양의 피를 토했으며 수혈을 했으나 아주 혼미한 상태라고 전해왔다. 전화를 끊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제발 이 형제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저희들 마음에 그 형제가 지워지질 않습니다. 당신이 한번만 더 기회를 주셔서 복음을 위해 다시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남편은 울먹이며 기도를 했다. 최근에 배가 아프다는 소식은 들었어도 그렇게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우리는 그 전화를 받고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고, 더 지체할 수 없어서 그 날 저녁 집회와 교제를 마치자마자 밤이 늦었지만 두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그 병원을 찾아갔다. 그 형제는 응급실 한쪽 구석 초라한 침대 위에 자신의 작은 몸을 맡기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 일행을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맞아주었다. 그 형제는 평소에 침착한 편이었고 표현이 적은 편이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별로 크게 내색하지 않는 조용한 성품이었다. 그렇게 많은 양의 피를 쏟았고, 고통이 심할 텐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에게 다가갔고, 남편은 그의 손을 잡고 교제를 시작했다. 이런 저런 말들을 주고받다가 수북히 올라온 그의 배 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그 후, 남편의 표정이 움찔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배에 딱딱한 것이 만져진다고 하면서 남편은 그 형제에게 물었다. "임마누엘! 생각나는가? 형제가 구원받았던 날이.... 그때 자네가 나한테 이 찬송을 가르쳐 주었었지.. 생각이 나?"하면서 남편은 그 찬송 첫 소절을 그 형제 귓가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때 우리 모두는 그 형제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한 동안 복음을 귀하게 섬기도록 하신 주님 앞에 다시 한번 이 형제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라게 되었다. "나는 그 날! 형제의 밝은 표정과 그 찬송소리를 잊을 수가 없어...." 남편은 힘들게 말을 이어갔다. 순간 임마누엘 형제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고, 우리는 그 형제에게 눈물을 안 보이려고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서있었다. 위암 말기였다. 담당 의사는 가망이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야기를 안 해주고 있었고, 다음날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해야한다고만 하며 미루고 있었다. 우리는 하늘의 소망과 복음에 대하여 잠깐 교제를 하였다. 내가 물었다. "형제님!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주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뭐예요?" "만일.. 회복된다면.... 회복된다면...., ...." 그러자 남편이 "그야 물론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지. 그렇지?...." 옛날 임마누엘형제가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복음을 위해서 살고 싶다고 바로 대답했을 텐데, 그는 "하나님이 회복해 주신다면 복음을 위해서 살고...." 힘들게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응급실을 뛰쳐나와 차안으로 들어와서 한참을 울었다. "바보 같은 형제!.... 미련한 형제!...." 주님이 주셨던 귀한 마음들을 사단에게 다 도둑질 당하고, 몸이 병든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감각도 다 죽어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는 생각이라는 병에 찌들려 있었다. 사단이 잠깐 후면 안개처럼 사라질 형편을 끌고 와서, 그 형제 속에 있었던 귀한 것들을 간교하게 무너뜨린 것이다. 그가 충만할 때말고, 그 마음이 형편에 빠졌을 때, 교회와 종들의 권면과 교제를 받을 수만 있었더라면...... 그러나 그는 자기가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와 종들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여러 번의 기회를 거절하고 미루었다. 캄프에 현지 전도자가 없었던 그 시절에, 이런 저런 핍박을 받으면서도 교회에 있던 캄프 형제자매들이 대견스러웠었고, 우리는 그 형제가 그렇게 고맙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그 형제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여준 그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다. 그 날밤 테마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테마로 돌아온 지, 이틀후 아침에 우리는 또 다른 전화를 받았다. 그 날 아침 새벽, 임마누엘형제가 임종한 것이다.

가나에서 그 동안 장례식 광경을 자주 보았었는데, 주로 여자들은 검은색, 짙은 갈색 또는 군 적색으로 옷을 입고, 머리는 검은 색 천으로 둘러 감는다. 남자들은 전통옷(마치 유대인처럼 긴 폭의 검은 천으로 몸을 둘둘 감고, 위에는 한쪽 어깨만 드러내고, 밑에는 치마처럼 내려뜨린다)을 입는다. 주로 토요일에 장례식을 갖는데, 대형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고, 조문객들은 돌아가면 춤을 춘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병원에 냉동보관하고, 가족들 회의에 의하여 장례식 날짜가 결정되면 대부분 한달 넘게 광고해서 온 친척과 친지 그리고 이웃들이 함께 모인다. 결혼식보다도 장례식을 더 성대히 하는 경향이다. 가끔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이 집회나 수양회 때문에 친척 장례식에 참석을 못하면 배신자 취급을 당할 정도로 장례식에 대한 결속력이 대단하다. 또 더러는 장례식 때문에 교회를 의도적으로 다니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가 장례를 지원하고 주관해 주기 때문에 그 의존도가 크다. 그러나 이번에 유족들이 대부분 우리 교회 형제자매들이어서, 가나교회 창립이래 처음으로 우리 교회가 주관해서 의인의 장례식을 갖게 되었는데, 새로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임마누엘형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가나 전국교회 안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특히 그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던 지체들은 더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모든 형제 자매들은 하나님이 두렵고 교회와 종에 대하여 또한 자신들의 삶에 대하여 새로운 마음들을 갖게 되었다. 지난 3월 23일, 금요일 저녁 우리가 캄프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서 북적거리고 있었고, 한복판에는 대형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형제자매들이 조용히 예배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한쪽 옆에서는 아이들, 어른들, 남자여자할 것 없이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형 스피커에서는 빠른 템포의 가나 노래가 온 산마을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 장소는 최근에 새로 만든 캄프교회 예배당 장소로 초가 지붕의 그늘이 있는 곳이었는데, 전에는 임마누엘형제의 가족들의 땅이었다. 지금은 우리 교회가 약 2500평의 부지를 구입한 후, 잡풀과 잡목들을 제거하며 평탄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그 위치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신작로 옆인데, 벌써 축구장만큼의 땅은 이미 정리되어서 장례식 하기에 아주 좋았다. 매주 토요일마다, 테마교회 장년형제들이 그곳에 가서 캄프 교회와 코푸리두아 교회의 연합으로 정리작업을 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냥 우연이 아니었고 오늘을 위해서도 하나님이 그렇게 준비하신 것이다. 예배드리는 장소 앞 왼편에 휘장으로 둘러진 빈소가 있었다. 늦은 저녁에 앗사리(Asare)목사님의 사회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남편은 밤이 새는 줄 모르고 확성기로 복음을 전했는데, 끝나고 보니 새벽 두시였다. 뒤에까지 빡빡하게 많은 사람들이 서서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고, 인근 교회의 형제 자매들은 대부분 온 것 같았다. 마치 이 깊은 정글 안에서 수양회를 하는 것만 같았다. 남편이 전하는 말씀은 산울림이 되어서 구석구석 그 깊은 숲속까지 들려지면서 잠자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는 것 같았다. 우리 교회의 찬송가를 부르고 모든 예배 순서를 우리식대로 진행했다. 그동안 그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이단이다. 더러는 적 그리스도다. 이런 저런 거짓 풍문의 의혹들이 많았는데, 우리를 바르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한참 복음을 전하는데 갑자기 술 먹은 청년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긴 말씀 시간 때문에, 춤추는 시간이 없어 짜증들이 난 것이다. 현지 전도자들과 실랑이를 벌인 후, 다시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다. 무엇보다 형제 자매들이 새롭게 말씀을 듣는 것 같았다. 말씀을 마친 후, 전도자들과 선교학생들이 수십 명의 영혼들과 한 밤중에 개인교제들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앗사리 목사와 반슨 목사가 계속 말씀을 전했다. 앗사리 목사는 구원받기 전에 임마누엘형제와 가까운 친구였었고, 또 캄프마을에 한동안 살았기 때문이여서인지 부족어(튜이어)로 마치 무엇인가를 다 토해내듯, 온 마음을 다해서 힘있게 말씀을 전했다. 또 조금 쉬었다가 반슨 목사(스웨드루 교회 시무)가 말씀을 전했다. 반슨목사 부부는 임마누엘형제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선교학교에 들어 왔었고, 그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많은 친척과 옛 친구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도 또한 호소하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했다. 특히 그 두 명의 전도자들은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빈소는 시신이 공개되어 있어서 조문객들이 수시로 빈소에 드나들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말없이 누워있는 임마누엘의 주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제자매들이 준비해준 관에 뉘여 있었고, 발치에는 생전에 모습이 담긴 큰 사진이 세워져 있었고, 주위는 조화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양복이 입혀져 있었다. 그는 평생 한번도 그런 양복을 입은 적이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교회 형제자매들이 준비해준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한번도 그 형제가 늘 같은 옷 외에는 다른 옷을 입은 것을 본적이 없었다. 날이 점점 밝아오자, 이곳 저곳 먼 산 마을에서 조문객들이 더 많이 왔다. 우리는 아침 8시에, 곧바로 발인예배를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우리 형제 자매들까지 어림잡아 칠백 여명이 되었다. 말씀이 끝날 즈음, 옆의 빈소에서 가족들의 오열하는 소리가 주위의 산허리를 찌르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없이 누워 있는 형제의 주검앞에 마지막으로 한번이라도 더 보고,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 가족들은 안타깝게 발버둥을 쳤다. "왜 이 사람아 이렇게 허무하게 가! 어떻게 이렇게 갈 수가 있는가!" 하면서 비통한 몸부림을 치며 오랫동안 형제의 시신 곁을 떠나지 못하는 분도 있었다. 아마 그의 오랜 친구였던 것 같다. 그때 사회를 보던 앗사리 목사님이 "Jesus Christ died for me. He carried my sins away...." 선창을 했다. "He carried my sorrows away" 라는 대목을 찬송할 즈음,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다. 반주를 겨우 마치고 나는 자리에 앉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갈 거면서 자기를 그토록 지켜야 했나!....." 흙에서 와서, 흙집에서 살다가, 흙에서 나온 것들을 먹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을 보면서 창세기 3장 19절 말씀이 생각났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 "아! 정말 사람이 말씀을 벗어 날 수가 없구나! 우리는 말씀에 의해서만 살게되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 후에 가족 중에 한사람이 나와서 조사를 낭독했다. 임마누엘, 그는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느 학교를 다녔으며, 운전을 배웠고, 누구와 결혼을 하여, 슬하에 자녀는...., 십오년간 오순절 교회에 다녔고 장로로 재직했으며...., 1996년 5월 기쁜소식선교회를 만나 복음을 듣고 거듭났으며.... 2001년 3월 2일 사십일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라는 어떻게 그가 이 세상을 살았는가에 대한 짧은 글이었다. 가족들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복음 전도자의 길을 거부했던 그는 이제 무엇하나도 돌보지 못한 채,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곧 이어 전도자들이 앞장서고 뒤를 따라 관을 맨 형제들과 가족들이 장지로 향했다. 하관시 "하나님! 흙으로 만든 몸을 이제 흙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그 동안 임마누엘형제를 통해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이 이곳에 남아 있는데, 이제 임마누엘 형제를 대신하여 그들이 이 산 마을 구석구석에 계속 복음을 전하도록 기도합니다." 하는 남편의 기도로 모든 장례식을 마쳤다. 금번 장례식을 통하여, 이 곳 산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말씀을 들으면서 활짝 열린 것이다. 임마누엘의 형인 캄프교회 형제 에드윈의 큰 아들과 딸은 복음을 섬기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형편 때문에 늘 주저해 왔었는데, 삼촌의 죽음을 대하면서 마음이 바뀌어 선교학교에서 훈련받고자 하는 마음을 간증했다. 토요화상채팅 시간에 맞추려고, 바쁘게 테마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형제자매들도 간증이 끊이지를 않았다. 육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에 대하여....,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임마누엘형제를 먼저 데려 가셨다고 모두들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다.

나 개인적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번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종과 교회의 인도를 받아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것인지!" 그리고 이번 주에도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복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전하는 그 종의 외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며, 참 된 삶을 깨우쳐 주실 지를 생각했다. "왜! 종이 그렇게 사셔야만 하는지!" 내 마음에 더욱 분명해졌다. 인생에서 어떤 삶이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인지! 다시 한번 되새겨 졌다. 마치 하나의 초가 녹아서 주위를 밝히듯이, 종은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다만 복음을 위해서 살아오셨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편 91: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교회가 하나님의 지혜로 깨우쳐 주지 않으면, 어리석은 인생이 어찌 자기의 날들을 계산할 수 있겠는가! 우리 스스로에게는 그 지혜가 없지 않은 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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