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형제님께.
안녕하십니까?
형제님의 컴퓨터에 한글이 인스톨 되었다는 글을 대하면서 주님 앞에 참
감사했습니다. 주님께서 몸은 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교회를 사모하는 형제님의 소원에 화답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형제님의 간절한
바램처럼, 인터넷을 통한 믿음의 교제가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형제님이 박 목사님께 팩스로 보낸 서신은 깨끗하게 복사하여 교회
게시판에 게시했는데, 여러 분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다. 박 목사님은
형제님의 서신을 대하신 후 형제님이 영국으로 가시기 전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란
주제로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강연한 것이 교회와 형제님 개인에게 큰 축복이
되었다며 감사해 하셨습니다. 조만간 예정대로 그때 강연한 내용을 중심으로
"생명공학과 하나님"이란 형제님의 란을 홈페이지에 신설할 계획입니다.
형제님의 란을 통해서도 복음의 생명력이 힘있게 발산되기를 바랍니다.
최근 저희 선교부는 자원자의 모집과 역할 배분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참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36명이나 되는 귀한 일꾼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어제 오후에, 확정된 자원자의
명단과 함께 5월 1일에 가질 총회 안내를 공고했는데, 주님께서 저희 같이 미약한
자들을 통해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라는 종에게 허락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이
소망스럽습니다. 자원자 총회를 가진 후 곧 박 목사님의 간증집인 "나의 하나님"과
형제님의 란을 신설할 계획입니다. 5월 부터는 박 목사님의 주일 낮 설교도 텍스트로
만들어 다운용으로 매주 실릴 예정이니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구역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형제님의 서신을 대한 후 쓰고 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형제님의 마음을 대하면서 구역 예배 때 나눈 말씀이 생각나 짧게나마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1,3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때, 즉 당신이 큰 능력을 발휘할 때
제자들이 버린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위해 팔려가는 때로 예수님의 일생 중 가장 어려운 때입니다. 어느 때보다 함께할 사람들이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철저하게 제자들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제자들 편에서 보면 매우 기분 나쁜 말인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때까지 3년이나 예수님을 좇아다닌 제자들의 열심과 노력을 모두
부인시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1년 전에 엑스포 코아에서 한 부인을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분은 얼마 전
시카고로 이민을 갔고, 며칠 전 조만간 시카고 교회에 나갈 것이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제가 처음 만났을 때 이 자매님은 큰 고통 가운데 지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관광회사
사장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IMF가 터진 후 부도를 만나 회사가 망했습니다.
물질적으로 어려운 것도 참 고통스러웠지만, 자매님에게 더욱 고통을 준 것은 사람들을
향한 미움과 혐오감이었습니다. 부유할 때에는 자주 가까이 하던 사람들이 회사가 넘어가자
도움은 커녕 모두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자매님은 매우 고통했지만, 결국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 새 소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후에 자매님은 자기가 가장 어려울
때 자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전에 잘 따랐던 그들의 모습이 거짓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잘 따르다가 그가 가장 어려울 때 버리는 것은 매우 비열한 일이고, 그 전에
잘 좇은 것도 위선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러한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름대로 예수님을 잘 좇았다고 생각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장 어려울 때 버리는 그 비열한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즉각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때 그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 통곡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더 낫게 여긴 자신의 근본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악한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며,
한편으론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를 깨우쳤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장 예수님을 위해야 할 때
부인하는 자신의 악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완전한 주님의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자신은
주님을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 동안 주님을 좇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은혜를
베푸셨기에 그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특히, 감사한 것은 그런 베드로를 주님은 처음부터
아시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를 온전히 은혜로 받으시고 은혜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근본을 발견하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완전한 부인이
완전한 주님의 은혜로 이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가장 필요로 할 때 당신을 버리는 그 비열한
베드로의 모습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베드로의 선한 모습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릴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이 목자를 치면 양의 떼는 흩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양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양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을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스스로는
결코 주님을 좇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는 말씀처럼,
베드로에게 긍휼을 베풀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에게는 어떤 조건도 필요
없으며, 다만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만 소망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2)
비록 제자들은 다 버릴지라도 주님이 살아나면 다시 그들을 모을 수 있고, 그들을 쓰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주님을 좇느냐, 좇지 않느냐는 그들에게 달려 있지 않은
일인 것입니다. 다만 주님이 살아나셔서 그들을 붙드시면 그들이 주님을 좇아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는 것을 불편해 하시지
않았고, 다만 주님을 기대하지 않는 베드로의 모습만 불편해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있지 않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다 버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열한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에게 기대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선한 조건이 없는 것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부인시키는 31절의 말씀이 마음에 걸림이 되었지,
능히 그를 이끌 수 있는 주님을 소개하는 32절에는 마음이 머물지 않았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조금 뒤에 나오는 자신의 근본 모습을 깊이 깨우쳤다면,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는 주님의 말씀을 달게 받을 것이고, 그 동안 자신을 이끈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릴 것이며,
곧 살아나셔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실 주님에게만 소망을 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부인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주님을 좇는 조건을
찾았고, 자신을 능히 이끌 수 있는 예수님은 부인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무너뜨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자신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 무너진 터 위에 주님이 세워졌습니다. 그때 그는 비로소 자신에게서
벗어나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온전한 자유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 저는 이 말씀을 형제 자매님들과 나누면서 제가 참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스스로 주님을 잘 좇고 복음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저를
능히 좇을 수 있게 하시고 은혜로 저를 받으시는 주님만으로 만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추하고 연약한 제 모습이 드러나면 정죄가 되었고, 뭔가 잘 되어지면 내가 잘 한 것처럼 쉽게
마음이 높아졌습니다. 최근 들어 주님께서 제 근본 모습을 보이시면서 동시에 주님의 은혜를
크게 보이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님은 제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 모습을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의 은혜와 긍휼만을 보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 역시 내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서 당신의 긍휼과 은혜만을 바라기를 원하십니다.
형제님께서도 "사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 6:5)이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시고, 근본 추하고 악한 형제님 자신에게서 벗어나 오직 형제님을
은혜로 부르시고 은혜로 붙잡고 쓰실 주님께만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밤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만 글을 맺어야 되겠습니다.
선한 베드로가 아닌 악한 베드로를 귀히 쓰신 주님의 은혜가 형제님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