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3-6)
3절에서 6절까지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7절에서 12절까지는 성령께서 "다양하게" 하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의 은사가 다양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 . .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의 일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7-12)
하나됨과 다양함, 이것은 하나님의 일 가운데서는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사를 보면 사람들이 하나됨을 지키려고 하다가 다양함을 완전히 소멸시켜버리고, 또 다양함이 발전하면 하나됨이 완전히 훼손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톨릭은 하나됨을 강조하다가 수없이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화형대로 몰아갔습니다. 반면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는 다양함을 이야기하다가 그리스도의 몸을 수 백, 수 천 갈래로 나누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이 진정한 하나됨, 진정한 다양함이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됨과 다양함에 대해서 매우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됨을 지키는 것이 다양함을 훼손한다면 그 하나됨은 수상한 종류입니다. 만일 다양함이 드러나는데 하나됨이 완전히 깨어진다면 그 다양함은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왜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됨"과 "다양함"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것이 "성령"께 속한 것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이고, 또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성한 하나됨과 다양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실은 "인간의" 하나됨과 "인간의" 다양함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세기 후반 19세기 중후반에 있었던 부흥시대에 리즈 하월즈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33년간 이 땅에 인간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2000년 동안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세상에! 정말 그랬습니다! 33년간 우리와 함께 육체를 입고 계셨던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귀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2000년이나 우리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2000년이나 우리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리즈 하월즈의 이 말은 거듭난 자의 안에 계신 분이 어떤 분인지, 그 분이 얼마나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 당신은 하나님이시군요!" 2000년 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기를 철저히 가리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다만 아버지만을 높이시고, 아버지의 영광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이후 2000년 동안 성령께서 사람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은 그리스도와 동일한 모습으로 자기를 철저하게 낮추시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시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보여주십니다. 그 분은 성부, 성자와 함께 혼돈되지 않고 하나되어 나란히 말없이 서 계십니다(Handley Moule).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성령"을 알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성령을 알지 못한 채, 하나됨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또 하나님이 일으키신 수없이 많은 참된 믿음을 영적인 "화형대"로 보낼지 모릅니다. 성령을 알지 못한 채, 다양함을 말한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전혀 보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하나되게 하신 것", 혹은 "아들의 하나되게 하신 것"이라고 하지 않았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이라고 성경이 표현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물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과 함께 일하시지만, 세대적으로 볼 때, 지금 이 세대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이 오셔서 구속을 성취하시고, 성령이 오셔서 그 구속을 사람들에게 실제로 적용하시는 세대인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성령은 당신 "안에" 계십니다(만일 당신이 그 놀라운 거듭남을 "경험"하신 분이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에 나온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오십니다. 그래서 거듭난 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그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실재`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이제는 교회의 "주"이십니다.
"이제 주는 성령이시니,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3:17)
"Now the Lord is the Spirit, but the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Darby 譯)
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이라고 했는지를 우리가 깨닫는다면, 그 하나됨 안에는 놀라운 다양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는 성령이시니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