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 5절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하셨고,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눈과 우리가 가진 눈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브라함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보셨고, 또 이삭의 아들 야곱, 그 다음에 유다, 그리고 계속해서 베레스, 세라, 헤스론
죽 이렇게 하나님 눈에는 보이는데 아브라함 눈에는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이삭도 안보이고, 야곱도 안보이고, 유다 도 안보이고. 하나님 눈엔 다윗 왕 외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 계에 사시니까 시간적으로 영원하지만 공간적으로도 영원하셔서 하나님이
영원한 세계를 보고 계십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 끝까지 모든 걸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써 아브라함에게
말씀해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을 보고 이 같으리라’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우리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는 겁니다. 사르밧
과부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내 눈에 보니까 가루 통에 가루가 한 움큼 밖에 없는데, 하나님의사람 엘리야는 ‘가루 통에 가루가 가득 찼다고 하시네?’ 그거죠. 그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 집에 있는 하인들은 ‘이게 분명이 물인데 예수님은 포도주라고 하시네’. ‘38년 된 병자가
볼 때 ‘나는 못 걸어 가는데 예수님은 걸어간다고 하시네’. 이제
이게 하나님이 보시는 눈하고 우리가 보는 눈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똑 같은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믿을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가루 통에 가루가 한 움큼 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통의 가루가 넘친다. 내가
매일 더 쳐다 봤는데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긴데, 거기서 하나님하고 우리가 이런 갈등이 일어나고 마귀는
우리를 시험할 때 거기다가 모든 초점을 맞춰서, ‘내가 정확히 봤는데,
가루 한 움큼뿐인데, 내 아내는 늙었는데, 애기를
못 낳는데.’ 그런 초점으로 우리 마음을 돌입시켜서 거기에 몰입되기 때문에 자기가 보고 있는 가루 통의
한 움큼 그 외에 다른 걸 볼 만한 눈이 없고, 자기가 늙어서 아기를 못날 그 형편을 보고 그 외에
더 크신 하나님의 세계를 볼만한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거든요.
어떤
선교사님 사모님이 있었습니다. 많은 복음의 일을 하면서 어렵기도 하지만, 다른 분들하고 사이에 갈등, 그게 해결이 안 돼서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저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모님이 만일에 그렇게 어려울 때에 분명히
선교사 사모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더냐?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더냐? 하나님이 이 부분에 어떤 부분을 이야기
하시더냐? 그게 중요한 거죠.
저도
삶을 살면서 어려웠을 때가 있고 힘들 때가 있었는데, 그때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서 사도행전을
읽어봤습니다. 사도행전 매 장이 시작할 땐 어렵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너무 복된 것으로 끝나는 것을 보니까 ‘야, 하나님
내 인생을 그린 것 같다’는 마음이 들죠. 지난 과거를 돌아보니까
처음에는 굉장히 어려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것으로 바뀌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려운 그 자체만 보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어렵지만 하나님이 일하신 그 역사들을 보게 되는 것이 너무 감사한 것이죠.
그래서 아브라함 눈에는 늙은 자기가 보이고, 정말 늙은 아내가 보이는데, ‘백살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까?’ 이제 아브라함은 웃어버린 거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눈으로 안보고 하나님이 벌써 보고 계시니까 ‘그 말이 옳다.’ 그걸 받아드리는데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정말 그 선교를 하다가어렵기도 하고 현지인들과 말도 잘 안 통하고, 어려운데 같이 있는 다른 그 사역 자들과 갈등이 일어나 얼마나 더 괴롭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갈등이 일어나도 예수님이 계시면, 예를 들어 말하자면, 사울 이 다윗을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이 같이 계셔 사울 은 다윗을 못 죽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나를 여기서 못 건져내겠나? 하나님이 내게 왜 어려움을 못 해결하겠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내 생각이 밝아지고 확실해지게 되고, 하나님의 생각이 내 마음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내 마음의 생각이 흐려지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신다고 하면 ‘그 하나님이 일하는데, 사울 이 어떻게 날 죽여?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하늘의 별처럼 많다고 그 말이 맞아. 난 잘 못 보니까.’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탄자니아에
가서 내가 말라리아에 걸렸는데, 의사가 귀를 찌르더니 피를 뽑아 가지고 나중에 현미경에 비쳐보니까 말라리아
균이 보이는 거에요. 분명히 말라리아 균이 현미경으로 보이는데 내 눈에는 안 보이는 거죠. 그래서 말라리아 균이 내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다고 하면 바보고, 내
눈에는 안 보여도 현미경에 보이는 것처럼, 우리 눈은 다른 사람보다 밝고 뭐 2.0, 2.5 그래도 하나님 눈에는 비교 할 수가 없고, 과거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보는 눈이 없으니까 그게 이제 문제인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눈이 밝으니까
내 눈에 안보여도 현미경으로 말라리아 균이 있다고 믿는 게 맞고, 내 눈에 안보여도 하나님이 앞으로
닥칠 일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은 그게 맞는 건데, 사람들은 ‘아 내가 오늘 아침에도 열어봤고 어제도 봤는데 가루 통에 가루가 한 움큼밖에 없었어. 말도 안돼, 거짓말이야. 안
그래.’ 하고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이라는
건 어디서 시작하느냐? 자기를 믿느냐 하나님을 믿느냐 그건데, 나는
아무리 밝게 봐도 아무리 귀가 좋아도 다 들리지 않고 다 보이지가 않습니다. 한 부분만 보이지, 내가 부분만 보는 눈으로 내가 옳다고 절대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 모래처럼 그 후손이 많을 것을 보시고 그렇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고,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볼 때 그렇게 안될 거 같으니까 아니라고 말한 우리하고,
그것이 차이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내가 볼 때 나사로가
죽어도 예수님이 산다면 산다고 믿는 사람, 내가 볼 때 야이로의 딸이 죽었지만, 예수님이 잔다면 자는 걸로 믿는 사람들, 내가 볼 때 이게 어렵지만
주님이 쉽다면 쉬운 걸로 믿는 사람들. 그게 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살다 보면 내 생각이 옳다고 큰 소리쳤는데 얼마 지나서 틀린 게 발견 되고, 내가 정말 맞다고 했는데 틀린 걸 발견하면서 내가 정확하게 옳지 않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그 다음에 내가 정말
나를 못 믿게 될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일어나면서,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접하고 접하면서 내 생각이 다 틀렸고 하나님의 뜻이 하나 하나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하나님을 믿으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처럼,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이렇게 이끌어 가시는데 이 사실을 알고 내가 볼 때에 틀린 거 같지만 내가 정확히 봤지만. ‘내 눈이 옳은 게 아니야. 내 생각이 옳은 게 아니야.’ 그런 사람들은 자기 생각보다 하나님을 믿고, 그 속에 하나님이
일한 일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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