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장 19절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옛날에 제가 성경을 깊이 잘 모를 때는 창세기 27장을 보고 의문에 젖었습니다. 에서는 성실하게 사냥을 했고 아버지 말씀 그대로 순종 했는데 저주를 받고, 야곱은 아버지께 거짓말 하잖아요. 자기 야곱인데 ‘아버지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그랬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야곱은 축복하고 에서가 저주받는 이런 이야기를 성경에 실었을까? 제 의견으로, 제 생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는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잘 모르고 하나님의 구원의 귀한 뜻을 잘 모르니까 이해가 안 가는 게 너무 당연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죄 사함 받고 하나님 마음을,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 마음 안에 조금씩 조금씩 눈을 뜨다 보니까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보이면서 이 성경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분명히 자기가 야곱인데 아버지 앞에 나갈 때 에서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 우리 인간들은 다 범죄했기 때문에 인간을 받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이 뭐 선한 일을 하고 잘했고 충실하고 진실하고 율법을 지키고 쭉 하는데 그건 인간 차원이고 하나님차원으로 볼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은 하나님은 악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그리스도이신데 하나님이 받으시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버림을 받아야 하잖아요. 창세기 27장에서 리브가가 이야기를 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만 쫓고 가서 가져와라’ 근데 야곱이 염소새끼를 가져오니까 리브가가 무슨 일을 하냐 하면 자기 집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힙니다.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에 매끈매끈한 곳을 꾸밉니다. 다시 말하자면 리브가가 하는 일은 자기의 아들 야곱이 축복을 받기에 합당치 아니한 사람인데 축복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귀한 사람의 모양으로 바꾸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기 부정함이 없도록 만들어 놓고 “이제 너는 아버지에게 복을 받으러 가라.”
야곱이 아버지 앞에 나갑니다. 나가는데 야곱은 저주를 받아야 하고 에서는 복을 받아야 하는 사실을 너무 잘 아니까 야곱이 “저는 아버지 둘째 야곱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저주를 받을 것이고 “에서입니다” 해야 복을 받을 줄 아니까 야곱이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하고 난 뒤에 시치미 뚝 떼고 뭐라고 말하냐면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이게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정말 제가 이런걸 보면 너무 감사한 것이 우리는 죄를 지어서 멸망을 받아야 할 사람인데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리브가가 자기 아들 야곱을 그렇게 하듯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할 사람인데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똑같이 의롭고 거룩하고 온전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그럼 나갈 때 ‘우리는 야곱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복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완벽하게 했으니까 ‘나는 에서입니다’ 하듯이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 앞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으니까 ‘나는 에서입니다’ ‘내가 야곱입니다’ 가 아니고 ‘에서입니다’ 담대히 나아가는 것처럼 오늘 우리 신앙은 내가 볼 때에 야곱인데, 내가 볼 때 하나님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인데 예수님이 내 모든 죄를 씻었고 거룩하게 온전하게 했으니까 ‘난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하듯이 ‘나는 의인입니다. 나는 거룩합니다. 나는 온전합니다. 예수 피로 온전하게 됐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내가 온전하니까 거룩하니까 의롭게 됐으니까 마땅히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신앙인 겁니다. 이걸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 내 연약하고 부족한 형편을 보느냐, 나를 위해서 행하신 예수님의 공로를 보느냐 그겁니다. 어머니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야곱은 그냥 그 상태로 가서 ‘야곱입니다’하면 당장에 저주를 받을는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에서처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처럼 똑같이 십자가로 의롭게 했습니다. 거룩하게 하셨고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나는 야곱인데, ‘나는 에서입니다’ 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주님 우리는 거룩합니다. 우리는 의롭습니다. 온전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 속에 역사를 하신다는 거죠.
저는 이런 성경을 잘 몰라서 옛날 율법에만 그 관련된 눈으로 보니까 야곱은 분명 거짓말 했고 형 에서는 정말 성실하게 했는데 왜 에서는 저주를 받고 야곱을 복을 받는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런 사실들을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저도 야곱이지만 에서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거룩하게 의롭게 한 뒤에 예수님의 이름을 주셨으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예수입니다.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의롭게 됐습니다.’ 당당히 이야기 하고 ‘하나님 나를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시고 내가 이제 거룩하게 됐습니다 의롭게 됐으니 하늘의 복을 내려주십시오.’ 하면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이런 믿음이 저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정직하니까 난 죄를 지어 죄인이라 하는데 그건 정직한 게 아니고 바보입니다. 더 정직하면 ‘예수님 우리 죄를 씻었으니까 확실하게 난 의롭습니다. 예수님이 죄값을 전부 지불했으니까 난 확실하게 거룩합니다. 난 의롭습니다.’ 그것이 정직한 것이지 자기가 거짓말하고 거짓말 안 한다고 온전한 건 아닙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야곱은 야곱이지만 어머니가 에서처럼 만든 것처럼 우리는 더러운 죄인이지만 이젠 죄인이 아니고 예수 피로 의롭게 됐고 거룩하게 됐기 때문에 당당히 ‘나는 거룩합니다. 의롭습니다. 온전합니다. 아버지 내게 역사하십시오. 복을 주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이 될 줄 믿는 것입니다.
저같이 더럽고 추한 인간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면 너무 감사합니다. ‘어떻게 나 같은 인간에게 일을 하시’ 그럴 때가 많습니다. ‘아니지 나 거룩하게 됐지. 나 의롭지. 예수님 십자가의 피로 온전히 씻어졌어. 나 맞아. 거룩한 게 맞아. 나 죄인이 아니지. 죄인이 아니야. 십자가의 피로 온전하게 됐어.’ 그런 믿음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 은혜와 복을 얻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름을 줬습니다. 기도할 때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지 말고 ‘나는 예수입니다. 하나님 내게 역사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겼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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