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 33절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하고’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어쩌다가 빚을 졌는지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빚을 지는 사람들이 항상 한쪽만 생각하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내가 돈이 필요해서 빚을 내서 삶을 살고 싶을 때, 빚을 갚아야 할 어려움, 그것을 생각지 못하고 임시 빚을 내서 쓰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그 한쪽만 생각하게 되면 빚을 지기가 쉽고, 빚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되면 삶을 억압해 오고 어려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지요.
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빚을 졌는데 임금님이 ‘네 몸과 아내와 자식들을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빚진 것 때문에 아내도 자식도 다 팔려 가야 했고, 자신도 종으로 팔려가는 정말 처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임금님이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일만 달란트, 보통 한 달란트는 42Kg이라고 하는데 일만 달란트는 42만Kg의 금의 양입니다. 트럭으로 수백 트럭이 될 만한 어마어마한 양의 금이, 돈이 빚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빚을 탕감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런데 빚을 탕감받은 그 마음에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고, 행복했고 기쁘고 한데 ‘야, 이제 우리가 빚을 갚았으니까, 빚을 탕감 받았으니까 아내하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겠구나. 아이들하고 한 집에 살아도 되겠구나.’ 그런 기쁨도 있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우리는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살면 돼. 앞으로는 빚지지 않고 잘 살아야지.’ 그런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지배한 것이 하나 있는데 임금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임금님은 무엇 때문에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종을 일만 달란트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을 손해 보면서도 탕감해 주는 것일까? 저분은 저러면서도 어떻게 부유할 수 있고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며 어떻게 저렇게 남들을 위해 일하실 수 있는 임금님이 되셨을까? 나는 나만 위해 살았는데도 빚쟁이였는데 난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았는데 저 분은 어떻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는 사람이 되었을까?’
만일에 이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사람이 임금님의 마음을 알고 이 임금님의 마음과 자기 마음을 비교해 보면 임금님의 마음에는 긍휼이 있고 사랑이 있고 자비가 있어서 너무 아름다운 마음인데 자기 마음을 보면, 자기 마음은 자기만 생각할 줄 아는 그런 나쁜 마음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 이래서 나는 빚이 졌구나. 임금님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셔서 임금이 되셨구나. 나도 저런 마음을 본 받아야 겠다. 나는 한번도 저런 마음을 가져 보지 못했는데. 나 같으면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을까? 절대로 안했을거야. 임금님에게는 저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를 탕감해 주신 것이구나.’ 그러면서 임금님의 마음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야, 참 기쁘다.’ 길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납니다. ‘오, 자네 오래간만일세. 잘 지냈는가?’ ‘그래.’ ‘자네 나한테 빚이 백 데나리온이 있지?’ ‘오, 그렇지.’ ‘아, 이 사람아 자네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인데.’ ‘내가 말이야 오늘 임금님께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임금님이 나 같은 인간을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종으로 팔려 가고 아내도 종으로 팔려 가고 우리 아들도 딸도 종으로 팔려 가면 일생에 서로 한 동네 살아도 만날 수도 없고 비참하게 종살이를 해야 할텐데 임금님이 나 같은 인간을 긍휼이 여기셔서 빚을 탕감을 해주셨어. 이 사람아. 내가 오늘 보니까 임금님 같은 마음을 처음 만났는데 난 그렇게 살지 못했거든. 나도 임금님과 같은 마음을 닮고 싶어. 자네 나한테 백 데나리온 빚진 것을 오늘 내가 탕감하네. 이젠 내가 안 받겠어.’ ‘아, 이 사람아 백 데나리온을 탕감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야, 이 사람아.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는데 백 데나리온이 뭐가 문제야. 난 정말 그 임금님 마음을 닮고 싶고 임금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어. 이제 자네 나한테 빚진거 아니야. 백 데나리온 다 탕감 한거야.’ ‘아이구, 고맙네. 고마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백 데나리온 탕감 받고서 너무 고마웠어요. ‘저 사람, 전에는 안그랬는데 임금님의 사랑을 받고 나더니 임금님처럼 닮아지네. 나도 그렇게 닮아봐야겠다. 내게 다섯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줘야지.’ 그러면 그 나라가 얼마나 아름답고 좋아지겠습니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일만 달란트 탕감은 받았는데 그 일만 달란트 탕감은 받았는데 그 주인의 마음은 받아 들이지를 않았습니다.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났습니다.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아, 내가 다음에 갚을게. 좀 봐주게’ ‘안돼.’ ‘너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 언제 빚 갚을거야? 당장 감옥에 가.’ 하고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사람들이 너무 민망해서 임금님께 이야기를 하니까 임금님이 하신 말씀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임금님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겼는데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내가 가진 이 마음을 왜 받아 들이지 않았느냐.’
우리가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것은 기쁨으로 받아 들였지만 임금님의 마음을 받아 들이지 못한 불쌍한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의 모양을 성경에 읽어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말씀을 쓰신 이유는 뭡니까? 일만 달란트 탕감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엄청난 죄에서 사함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엄청난 죄를 사함 받고 값없이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는데 그러면 우리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해주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마음을 헤아리고 내 마음에 그런 마음이 없으니까 내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 들인다면 예수님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것처럼 우리도 탕감해 주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산다면 우리가 기쁘고 즐겁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갖기를 거부하고, 자기 마음을 가지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다가 보면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기 전과 같은 모양으로 돌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너무 너무 많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죄를 사함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다면 ‘지금까지 내가 내 생각을 가지고 살다가 빚이 졌는데 이제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나도 그 마음으로 살아야 겠다. 내 생각으로 살지 말고 그 마음을 받아 들여야 겠다. 내 마음은 악하고 추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야 겠다.’ 이런 마음을 가짐으로 주님이 기뻐하고 축복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실 최근에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이 사단에 속아서 예수님의 마음을 버리고 자기 생각을 따라 때로 남을 비방하고 비판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주님이 그런 사람을 볼 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겨 너의 모든 것을 사해 주었는데 네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비난한다면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긴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을 긍휼이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그런 말씀을 하실 때 뭐라고 하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살았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복되고 영광스럽게 사는 삶을 가져야 할 줄을 믿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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