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장 2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가 저희들 아파트에 막 왔을 때 참 감사했던 것이 방이 안방이 하나 있고, 또 작은 방이 두개있고 또 조그만 서재를 합해서 네 개가 있었습니다. 내가 집에 들어가면 내 마음에 무슨 마음이 있었느냐 하면, 만일 이런 아파트가 예루살렘에 있고 만약 예수님 당신이 계셨다면 내가 이 아파트를 예수님에게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루종일 말씀을 전하시고 쉴만한 곳이 없으셔서 감람산에 가서 주무시고 그 이튿날 아침에 시장해서 성전에 들어가시다가 무화과 나무를 보고 가까이 가서 보니 무화과나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예수님 사시는 것이 불편하셨고 어려우셨겠나?’ 그래서 제가 있는 이 아파트에 예수님이 사시면 작은 방에 예수님 혼자 쉬시면서 기도하시게 하고 나머지 3개의 방에 한곳에 제자들 4명씩 나누어서 12명이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예수님이 샤워를 하시고 식사를 하시고 전도하러 가시면 내가 들어가서 방 청소를 해놓고, 방을 정리를 해놓고 예수님을 기다리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김천에 있을 때에 한번 집이 참 어려워서 돈은 없고 집을 새로 얻어야 할 형편이 되었는데 너무 너무 어려웠습니다. 제가 새벽마다 일어나서 기도를 했는데 내가 집이 없어 어렵기는 하지만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기도하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주님 앞에 더욱 더 가까워진다는 그런 생각이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 앞에 계속 기도를 하고 하면 점점 주님하고 나하고 계속 가까워지면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이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니라 주의 문제가 되면 주님이 아름답게 해결해 주시겠다는 그런 생각이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국 제가 어떤 집을 봤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그 집을 주님이 나에게 주시겠다는 마음이 확실하게 들었습니다.
제가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주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 도시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러 왔는데 이 도시의 시민 한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쳤습니다. 내가 전세 보증금을 준 돈을 가지고 집은 은행에 넘기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이 집을 나에게 주시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돈이 하나도 없는데 이 집을 나에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제가 평소에 그런 얘기 절대로 못할 사람이고, 절대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아닌데 그때는 하나님이 그 집을 나에게 주시겠다는 확실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께서 가만히 생각을 하시더니 얼마 지난 뒤에 입을 여셨습니다. “나는 시내 모 교회 장로올시다. 하나님께서 국도변에 나에게 이렇게 좋은 건물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종이 쓰신다는데 어떻게 내가 막겠습니까? 쓰십시오.” 너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이사를 하는데 저는 형제들이 이사를 하도록 하고 저는 전도하러 갔다가 어떤 집에서 복음을 전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비가 막 오는 거예요. 주인 분이 “아, 우리 집에 우산이 없어서 어떡하지요?” “괜찮습니다. 비를 좀 맞아도 괜찮습니다.” 성경책을 비에 안 젖도록 옷자락에 싸서 오면서 비를 맞으며 왔습니다. 오다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집 한 채 없고 방 한 칸도 없으셨는데 이런 비가 오는 날 어느 집에서, 처마에서 비를 피하셨을까? 바람이 부는 날, 찬바람을 어떻게 피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 제 마음이 너무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제가 비를 맞으면서 집에까지 울면서, 울면서 왔는데 ‘주님 당신 세상에 사실 때 집 한 채 없이 사시면서 저들에게 이런 집을 주님이 주십니까?’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지는 않았지만 저도 예수님처럼 마음 안에서 집이 없이 한번 살아봤습니다. 그리고 방이 없이, 제가 그냥 무전전도 여행 몇 번 갈 때 그렇게 해본 적은 있지만 그렇게 내 마음에서 그려보니까 내가 집에 들어와서 따뜻한 방에 잠 잘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했고, 집 안에 들어 올 때마다 하나님 앞에 뜨겁고 감격스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집 없이, 방 없이 살아야겠다. 살고 싶다.’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음을 들고 3년 동안 집이 없이, 방이 없이 사셨습니다. 태어나실 때 태어나실 곳이 없어 남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최후 만찬 할 때도 방을 빌려 쓰셨고, 그리고 마지막에 주님이 돌아가신 뒤에 무덤도, 주님이 무덤이 없어서 빌려 쓰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것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단벌 옷을 입고 계셨고 그냥 좋으나 싫으나 적은 음식 드시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영광스럽게 사는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그렇게 사셨던 것을 생각해보면 나도 종종 정말 주님처럼, 그렇게 내가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차를 타고 있는 것이, 방에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좋은 예배당에서 내가 기도를 할 수 있고, 우리 목회자들이 모여서 말씀을 나눌 수 있고 그런 것들이 얼마나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다 보면 편해지면 더 편해지고 싶고, 좋아지면 더 좋아지고 싶고 그런 마음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도 똑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더 편해지고 싶고, 더 좋아지고 싶고, 더 좋은 거처를 원하고 좋은 곳을 원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씩 주님을 생각하면, 주님이 사시는 삶을 생각하면 내가 주님처럼 방 한 칸 없이, 집 한 채 없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 마음이 굉장히 겸비하고 낮아지면서 주님을 생각하고 마음을 낮추는 것에 굉장히 복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사도바울도 주소가 없지요. 어떤 사람이 바울을 만나서 “당신 주소가 어디입니까?” “아, 내가 아무 집에 잠시 머물고 있습니다. 예, 제가 이제 감옥에 곧 가야 합니다.” 아마 그런 이야기를 하지, “내 집 주소가 어딥니다. 어디로 오시면 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마 바울은 그렇게 못했고, 베드로도 역시 그랬고, 우리 앞에 많은 주의 종들이 그렇게 인생을 사셨습니다.
저는 주님처럼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그런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잠잘 수 있는 방이 너무 감사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너무 기쁘고, 옷을 입고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 정말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복되고 영광스럽게 하셨고 또 우리가 하늘나라의 그 영광스러운 거처에 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 고난을 대신하셨고 우리 어려움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냥 생각대로만 살지 말고 한번씩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훨씬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겸비하고 나 자신을 위해서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이 많은데 그 욕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에 오늘도 주님을 이렇게 생각해 봤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주님께서 피곤하셔서 파도치는 배 위에서 주무시던 일이나, 그 다음 예수님께서 정말 피곤하셔서 사마리아 우물가에 그대로 주저 앉으셨던 일이나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주님은 참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주님보다 훨씬 편하고 복된 삶을 살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사니까 두렵습니다.
자주 우리 마음으로나마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을 사시게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ply 윗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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