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5회] 박옥수 목사 3월 29일 토요영상교제 말씀

열왕기하 5 3절입니다.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시리이다.

 

제가 성경을 읽어 보면 성경은 항상 우리 속에 내가 가진 마음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마음의 세계를 열어서 내 마음을 그쪽으로 이끄는 것을 볼 때 너무 감사합니다. 아마 성경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디로 끌려 갔을까요? 내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따라서 죄악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성경이 내 마음의 손목을 잡고 나를 끌어 주어서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는 동안에 내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 속에서 살고 있고, 새로운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러실 줄로 믿습니다.

 

열왕기하 5장의 나아만 장군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그냥 여기 전에 아람 사람들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의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 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열왕기하 5 2절에 보면 이 계집 종이 포로로 잡혀 와서 원수 나라에 장군의 아내의 몸종이 된 삶을 소개하고 있는데,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 이것만큼 불행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마 이 자매가 하나님을 믿는 자매인데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이렇지? 내가 무슨 저주를 받은 거야. 왜 이래? 딴 사람은 안 잡혔는데 왜 나만 잡혔어? 내가 언제 여기서 도망가서 피할 수 있지? 내가 언제 사랑하는 어머니를 만나고 동생들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언제까지 이런 종살이를 해야 할까?’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계집 종의 삶 속에 소망이라는 것은 전혀 없고, 어디를 봐도 절망 속에 빠져 있고 고통 속에 슬픔 속에 그러다가 우울증에 걸려서 울다가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너무 신기한 것이 3절에,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이제 그 3절에 들어가면 2절의 아주 절망적인 위치에 있는 이 계집 종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어느 날 계집 종이 뭘 만났느냐하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환자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아이고, 내가 나아만 장군 옷 빨다가 내가 문둥병 걸리는거 아냐? 조심 해야 돼. 고무장갑 껴야 돼.’ 뭐 그런 생각을 할텐데 이 계집 종은 그런 생각 전혀 없이 나아만 장군 문둥병 걸린 것을 알게 되었을 때, ‘, 우리 장군님이 문둥병자구나. 저거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가면 엘리사 선지자가 금방 고칠텐데. 우리 엘리사 선지자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데 저것 고치는데 뭐가 문제야. , 이거 이야기해 줘야겠다’. 이제 이 계집 종의 마음 속에 절망이나 고통이나 두려움이나 그런 것들이 그냥 다 물러가고 소망이 그 마음 안에 자라서 커가는 것을 볼 때 너무 너무 놀라운 것입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계집 종의 마음에 소망이 있는 거예요. ‘, 우리 장군님이 가서 사마리아에 가면 엘리사 선지사를 만나겠지. 엘리사 선지자께서 병만 고쳐 주실까? 복음도 전해 주실거야. 장군님이 구원받고 돌아 오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하고 기도회해도 되겠네. 성경공부 해도 되겠네. 그 뿐 아니라 왕에게 복음 전하시겠지. 그리고 장군들 모인데서 정말 복음 전하겠지.’ 이런 생각을 해보니까 이 계집 종은 막 소망이 속에서 일어나는 거에요. 저는 이것을 보면 성경만이, 하나님 믿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지난 여러 해 동안 어떨 땐 제 마음 안에서 절망이 와서 제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가 많았고, 근심이 두려움이 제 마음을 두드릴 때가 참 많았는데 내 마음에 절망이나 고통만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마음을 주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요?

 

성경을 읽어 보면 창세기 3장에서 아담, 하와가 범죄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그들이 자기가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하였더라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 아담에게, 하나님이 하와에게 주신 눈은 지금 우리가 가진 이 눈하고 전혀 다른 눈이었다는 것입니다. ‘, 그랬었구나. 우리가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이렇게 바꼈구나.’ 아담 하와가 밝은 눈으로 뭘 봤습니까? 자기들의 벗은 허물을 보고 부끄러워 가리기에 바빠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하고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않은 한 분이 있다면 그 분은 예수님인데,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가 보는 눈하고 다른 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하인들이 통에다 물을 갖다가 부었습니다. 우리 눈에 볼 때 분명히 물인데 예수님의 눈에는 포도주였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야이로의 딸이 죽었는데 예수님의 눈에는 살았습니다. 잠자고 있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 나사로가 썩어 냄새가 나는데 예수님의 눈에는 일어나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볼 때 계집 종은 너무 비참한 삶인데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소망이 넘치는 장소라는 거지요. 그 장소가.  우리 눈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가진 눈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서 잘 못되어진 방향으로 뜨여진 눈이기 때문에 절망만 보이고, 두려움만 보이고, 근심만 보이고, 미움만 보이고, 불신만 보이는 눈으로 우리 눈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소경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눈 먼 소경을 보고 똑 같은 소경인데 뭐라고 하냐면 이 사람은 죄를 많이 지어서 소경이 되었을 거야. 아니야, 그 부모가 죄를 지었을 거야.’ 그러고 있는데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입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똑 같은 상황도 주님이 보는 것과 제자들이 보는 것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눈으로 보고, 우리가 가진 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하는 이것은 올바른 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두려움으로 근심으로 절망으로 불신으로 우리 마음을 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을 가지고 보면 어디든지 소망이 있지요. 계집 종이 바로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형편을 보았습니다. 그냥 자기 눈으로 보면 내가 문둥이 집에 와서 종살이 하고 이게 무슨 꼴이야.’ 낙심하고 절망을 해야 하는데 , 우리 장군님이 문둥병을 나으면 어떻게 될까?’ 저도 계속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돌아와서 여보, 나 다 나았어. 여기 등 좀 봐요. 여기 다리 밑에 봐요. 여기 봐요. 다 나았지요.” 막 아내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데 서 있는 계집 종을 볼 때 달려가서 막 포옹을 하는 것입니다. “고맙다. 너 때문에 내가 병이 나았어. 너 없으면 한평생 문둥이로 살다 죽을 텐데 너 이제 우리 종하지 말고 우리 딸 해.” 생각을 하면 그 뒤에 구원 받는 역사들이 일어나고 이제 막 장군들이 모여 회의할 때마다 나아만 장군이 간증하고, 계집 종이 가서 간증하고, 결혼하고 막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 너무 행복한 거예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절망 속에서, 어떤 두려움 속에서, 어떤 슬픔 속에서 그것을 밀어내고 마치 어둠이 가득한 방에 불을 켰을 때, 어두움이 도망가듯이 하늘의 밝은 빛이 우리 마음에 비취면서 어두움을 보는 눈이 다 물러가고 소망과 정말 사랑과 기쁨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뜨여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눈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 가까이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받아 들이면 여러분의 눈이 바뀌고 마음이 바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 상황에도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삶이 될 줄을 믿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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