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기 전에 어느 목사로부터 하나님은 그리 만만한 분이 아니시라는 말을 들었다. 옳게 들렸다. 하나님이 만만한 분이어서야 되겠나? 있는 정성을 다하고 낼 수 있는 열심을 다해야지! 그래야 그 마음을 푸신 하나님이 응답도 하시고 복도 주시겠지!!
나 스스로 하나님이 만만하신 분이 아님을 인정하면 할수록 나의 선한 생각과 주관은 더 분명해지고 견고해졌다. 더 의롭고 싶었고 더 성실하고 싶었다. 만만하지 않은 분의 눈에 들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정성과 노력을 다 했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더 불분명 해졌고 더 불투명해졌다. 봄 날의 황사처럼 내 마음은 늘 뿌---했다.
내 마음의 황사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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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글귀는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글귀을 갖다 붙여도 만족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부흥회를 통하여 복음을 들었다. 어렸기 때문에 분명하게 들을 수 없었겠지만 그러나 돌이켜 보면 막연했던 것은 분명하다. CCC의 전도소책자 4영리는 분명히 마음의 주인이 바뀌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의자에 "나"가 주인이었다가 "예수"로 바뀌는 그림이 잘 설명되어 있었다. 분명 복음이었다. 나는 그 소책자를 수도없이 보고 읽었지만 정확하게 복음을 깨닫지 못했다. UBF에도 복음이 있었다. 구속의 은혜를 강조했고 "from"과 "to"를 분명히 해야했다. 그러나 역시 내게 능력이 되지 못했다. 말씀으로 내 마음에 구원의 은혜가 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교회를 분리하여 선교회에 속하기 전에 나는 월간 "기쁜소식"을 읽으면서 그 정확함에 놀랐다. 수십권의 책속에 우선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어서 믿음이 갔다. 무엇보다도 신앙은 마음으로 한다는 말씀은 나의 신앙의 혼동혼미를 서서히 그리고 빠르게 날려주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나는 신앙을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 몸으로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누구도 정확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만 신앙은 죽음 앞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는 것이 관건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야 순교할 수 있고, 그런 믿음이야말로 참 된 믿음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세계를 몰랐던 나에게 마음의 세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가르침은 나에게 분명한 답을 주었다.
죽은 자가 주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은 실로 어둠 가운데 비치는 밝은 빛이었다. 마음이 무너진자가 비로소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니-----.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이 낮아진 마음에 주의 말씀은 흘러 들어가는 것이었다. 빈마음이어야 했다. 빈그릇이어야 했던 것이다.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 고이듯이 마음이 낮아야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 처음 듣는 "기쁜소식"이었고 그 소식이 나의 마음의 눈을 환히 밝혔다.
나 스스로 정확하고 분명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부정확했고 불분명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나 스스로 정확분명하고자 했을때 나는 끝없이 불분명불투명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추하고 악한 죄로 물든 나의 어떤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정확분명할 수 없었다. 예전에 비하여 지금, 현저히 부정확하고 불분명한 나이지만 그런 나를 정확하게 하시고 분명하게 하시는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루하루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다. 감사하다.
내 마음의 황사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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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빗물로 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