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ise the Lord! Sing a new song to the Lord!
내 핸드폰 대기화면 문구는 "썩은 들소"다. 홈페이지 아이디는 "deadbulls"이고 비밀번호는 "deadcow"다. "ox"가 아닌 것은 짧은 영어실력 탓이다.
커다란 짐승 하나가 시커먼 가죽을 덮어 쓴 체 고꾸라져 있었다. 머리가 없었다. 험악한 골격이 드러난 그 몰골은 흉칙했고 지극히 혐오스러웠다. 나는 순간 몸서리치며 공포심마저 느꼈다. 이상하고 기괴한 일이었다. 자주자주 그 장면을 생각할 때 마다 나는 몸서리쳤다. 도대체 이게 뭐지?
종들의 말씀을 들으며 성경에서 사람이 소로 비유된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성실하고 충직한 소! 묵묵히 견디며 평생을 일하다 마지막 뼈조각, 가죽까지 내어주는 소! 얼마나 흐못하고 기분좋은 묘사던가? 그러나 그 반대의 측면이 있었다. 어리석고 미련하기만 한 소! 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평생 힘만 쓸줄 아는 소! 그 잘 난 뿔 믿고 그 뿔 세워 되는대로 들이 받으며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썩을 놈의 소! 그렇게 성실하고 충직한 소가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대명사일줄이야 -----. 그건 내 모습의 일면이었다.
죽어 썩은 그 소가 일어나 돌아다닌다면 역한 냄새가 진동할 것은 당연했다. 아니 그 움직임 자체가 더럽고 흉악한 괴물의 난동일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에게 구역질나는 혐오감을 주는 것을 넘어 참담한 공포심까지 유발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냥 그자리에서 그대로 썩으면 다행이었다. 먼지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때까지-----.
그런데----. 그 죽어 썩은 소가 잠자고 일어나 밥을 먹고 물을 마셨다. 버젓이 살아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거룩한 현장에서 거침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예배에 참석하여 찬양하고 있었고 종들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신기했다. 악취를 풍기지 않는 것 같았고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지도 않는 것 같았다. 분명 내가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러면 나는 누구를 사는 것인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었다.
나를 세우면 구역질나는 썩은 냄새가 진동할 것이었다. 내가 옳다하면 그 순간 나는 공포스러운 괴물이 될 뿐이었다. 그 흔한 귀신 영화의 추악한 미이라도 못되는, 그 썩어 문드러진 짐승을 누가 한순간이라도 두고 볼 수 있겠는가? 당장에 깨 부수어 묻을 것도 없이 계곡에 던지거나 물에 빠뜨릴 일이었다. 아니 그냥 재빨리 피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죽어 썩은 과거의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과거의 신분도, 나이도, 내 안의 그 어느 것도 내세울 수 없었다. 내세우면 구역질나고 지극히 혐오스러운이 일이 될 것이었기에!
창세기 41장에 바로가 요셉의 해몽을 좋게 여기고 애굽 온 나라를 맡겨 치리케 한 이유는 그 마음에서 파리한 소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얘기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 대단하고 권세있는 바로가 어떻게 요셉이라는 무명의 유대인에게 애굽 온 나라를 맡길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유는 바로의 마음에 꿈에 본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마리 암소가 늘 있어서 자기로서는 그 사망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다 맡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사망이 와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길 수 있다는 말씀이 결론이었다. 지난 겨울수양회에서 들은 김재성 목사님의 말씀이었다.
내 얘기였다. 내 마음에는 일곱마리가 아닌 한마리의 흉칙하고 추악한 소가 있었다!
잊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구역질나는 존재인지를! 핸드폰이 아니라 몸에 새긴들 잊지 않을까? 주께 내 마음을 그대로 내어 맡길 뿐이다. 어찌 하시든 주께서 하실 일이다! 아멘!
성경에 "암소"로 되어 있어 "cow"가 틀린것이 아니니 -----. 다행이다!
해브 어 나이스 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