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샬롬! 장형제입니다. 먼저 저의 구원간증문을 올리고자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제 간증의 출발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간증은 2007년 가을 대전도집회가 끝나고 적은 것입니다. 그때 생각지도 않게 간증문 제의가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급히 이틀만에 적었습니다. 결국 내용이 그 주간의 "기쁜소식" 편집 의도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묻히고 말았지요! 조금 아쉬웠지만 먼 나중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양이 통상의 간증문보다 많습니다. 짧게 쓴다고 쓴 것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감격에 겨워 많이 들 뜬 상태에서 적다보니 자기자랑이 대부분이고 글도 매끄럽질 못합니다. 그때는 정말 자랑하고픈 마음이 많았었지요! 결국 그렇게 될 수 없었습니다만-----. 이제라도 올릴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전 지금도 이 간증문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부족한게 많지만 가끔 읽으면 눈물이 납니다. 마음에 어두움이 드리우거나 걱정염려가 피어나면 이 간증문을 읽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감격이 새로와지고 주의 위로와 소망이 넘칩니다. 차---암 감사하지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전쟁중에 홀로되신 어머니의 신앙심의 영향으로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알았고 신앙을 배웠다. 내 고향 충남 부여 홍산의 홍산(기장)교회는 나에게 작은 꿈을 갖게 해 주었다. 나는 착하고 온순해서 가족이나 이웃들로부터 귀여움과 사랑을 받았다. 공부도 곧 잘했다. 신앙이 없으셨던 아버지의 핍박은 어머니에게는 늘 고통이었고 우리에게는 슬픔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예배와 기도, 부흥회 참석, 철야, 금식을 그치지 않으셨다. 우리는 6,25때 개성에서 월남하시다 남한땅에 혼자되셔서 오직 믿음으로 사시는 어머니를 보며 열심있는 신앙을 배웠다. 어머니의 신앙심은 거의 초인적이라해도 틀리지 않았다. 피붙이 하나없는 이남에서 어머니는 극한 외로움과 슬픔을 오직 신앙심 하나로 견디시고 이기셨다. 아버지의 핍박을 견디시며 변함없이 열심이신 어머니의 신앙의 모습은 우리에게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기에 은근한 자랑꺼리요 자부심이었다. 나는 축복의 아들이었다. 이미 4자녀를 보신 어머니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기로 작정하시고 남은 생은 오직 주의 일만 하시기로 서원하셨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아이가 들어섰다. 바로 나였다. 어머니께서는 유산할 계획을 세우셨다가 어느 은사자가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시는 아들이니 낳아야 한다는 권고(?)를 듣고 나를 낳으셨다. 어느 부흥강사가 아들 셋은 주의 종이라고 예언했다며 내 위의 형과 나, 동생은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암시는 주입이자 세뇌였다. 내 인생은 축복의 아들로서 주의 종이 되는 운명으로 어릴 때 이미 결정지어졌다. 주일학교와 소년회 활동을 했다. 주일예배에 10원 헌금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부활절에는 계란을 먹었고 성탄절에는 성극을 했으며 다과를 나누었다. 소년회에서는 여름수양회가 좋았다. 바다로 산으로 수련회를 간다 했지만 피서이거나 야영의 시간이었다. 부흥집회가 많이 열렸었는데 집사님 아들인 나는 거의 참석해서 말씀을 들었다. 나에게는 어떠한 감동이나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다. 부흥강사들의 우스개 소리와 과장된 몸짓만 기억에 남았다. 당시의 집회에서는 죄사함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말씀이 끝나면 손을 들게 하거나 초청을 하곤 했는데 어린 나로서는 갈등의 시간이었다. 어느 집회에서 죄사함받은 사람은 손을 들라했는데 많이 갈등하다가 얼떨결에 손을 들었다. 명단을 적으러 온 동네형이 손을 든 나를 보고 "넌 교회 다니잖아? 미치겠네!" 하면서 이름을 적어갔다. 그 때 나는 얼떨결에 죄사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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