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장 10절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저희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강남교회 장년들이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는데 오늘 읽은 이 말씀은 조금 전에 장년회에서 나누던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겟세마네 동산에 군인들이 왔을 때 칼을 빼서 그 종 한사람의 귀를 베어버리는 그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태국에서 글로벌 캠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일들이 너무 크고 감사한 반면에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나 자신을 바라보면 ‘내가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족하다.’ 그런 생각이 늘 나를 지배했습니다. 내가 이것도 좀 잘해야 하고, 저것도 좀 잘해야 하고, 기도도 좀 더 해야하고, 성경도 더 읽어야 겠고 그런 것들이 늘 내 마음을 지배해서 내가 자꾸 잘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내가 갖게 되는 걸 볼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 태국 글로벌 켐프를 하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부딪히고 또 저희들 강남교회 일이나 이런 일들을 볼 때 ‘이야 내가 참 부족하다. 좀 잘해야 겠다.’ 그런 마음이 상당히 나를 지배했는데 오늘 저녁에 요한복음 18장을 읽으면서 강남교회 장년 형제들이 한분 한분 나와서 발표를 하는 그 시간이 너무 은혜로웠고 또 18장 이 말씀 속에서 베드로의 모양을 정확하게 기록한 거예요.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 앞에 충성된 종이 되기 위해서 뭔가를 좀 잘해야 겠다는 생각속에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는 절대로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했고 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그랬지만 절대로 베드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예수님을 잡으러 군병들이 왔을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가지고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리는데 이제 제가 그때 베드로의 마음을 냉정하게 한번 살펴봤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 칼로 그 많은 군인들과 싸워 이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도 그 칼을 빼서 군인들의 종들을 치다가 오히려 그쪽에서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베드로가 죽을는지 모르는 그런 위험한 위치 속에서도 그래도 내가 주를 위해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검을 빼가지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치는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요.
그게 베드로가 굉장히 부담스럽지만 그러나 내가 주를 위해 뭘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칼을 빼가지고 나갔고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지만 그래도 나는 주를 위해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서 대제사장의 집까지 들어갔지요. 거기 가서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그런 일들이 베드로에게 일어났습니다. 차라리 베드로가 주님을 버리고 도망 갔더라면 주를 부인하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거지요.
제가 이번에 글로벌 캠프를 하면서 우리 교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당하면서 ‘이야 이거 내가 참 부족하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내가 좀 더 잘 해야 되는데...’ 그런 마음들이 내 마음에 들어올 때가 참 많은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요한복음 18장의 베드로를 보면 정말 주님을 잡으러 왔을 때 주님은 알고 계셨지만 베드로는 아무 방책이 없고 대책이 없었고 엉겁결에 칼을 빼들고 또 주를 부인하고 아무 생각없이 그런 일들을 하고 실수를 하는 이런 베드로를 들어서 정말 하루에 삼천명씩 구원을 받게 하고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은 주님이지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가 못나면 어떻습니까? 무식하면 어떻습니까? 부족하면 어떻습니까? 악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좀 더 잘 되어서, 내가 잘 해서 주님 앞에 쓰임을 입는 건 내가 뭘 하는 것이고 내가 형편없고 추하고 더럽지만 사랑하는 주님께서 나를 들어 쓰신다면 그 주님에게 기대와 소망을 가지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거라는 거지요.
그래서 여러분 신앙이란 건 내가 주를 위해 잘 되어서, 충성되게 해서 그래서 내가 주님 앞에 쓰임받는 게 아니고 나는 모자라고 형편없고 연약하고 그렇지만 사랑하는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나를 쓰는 그게 진정한 신앙이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이 요한복음 18장에서 베드로 마음의 모양을 그대로 명백히 기록해놓고 우리 마음을 거기다 비추어 봤을 때 우리도 베드로처럼 내가 교회를 위하여, 복음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무엇인가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이제 내가 나타나서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치는 그런 일밖에 안하고 그게 주의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차라리 내가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연약하고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서 사랑하는 주님께서 쓸모없는 인간, 나귀 턱뼈를 들어 쓰듯이 정말 여러분 우리가 부족한 종들을 들어 쓰는 거지요.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야곱이나 노아나 그런 사람들이 온전해서 쓰임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들이 다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잡아 쓰셨기에 귀한 일군이 되어졌다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주님 앞에 쓰임을 받기 위해 더 잘 하거나 더 충성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여전히 못나고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를 들어쓰시면 우리가 쓰임을 받기 때문에 내가 주님 앞에 쓰임을 받기 위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뭘 해야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떠하든지 주님이 나를 들어 쓰시면 내가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주를 바라보는 그것이 참된 신앙이란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베드로가 그랬듯이, 또 제가 그랬듯이 우리는 자주 우리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내가 온전해지고 새로워지려고 애쓰고 노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부족한 걸 고치는 분도 주님이고 쓰시는 분도 주님이기 때문에 내가 새로워지거나 변화를 받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 나는 이렇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온전케 하시면 내가 온전해 지겠습니다. 당신이 쓰시면 쓰여지겠습니다.” 그게 내게 달려있지 아니하고 주님에게 있는 걸 깨닫고 주를 믿는 믿음을 갖게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속에 일하시기에 참 편리하시고 많은 일을 이루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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