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장 3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복음으로 달려가려고 할 때 성령은 우리에게 크게 역사를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내놓고 보면 ‘아 우리가 어떻게 그때 그 일을 감당했을까? 정말 우리가 한 게 아니야. 이건 하나님이 하셨어.’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 행복하고 소망이 넘치는 거지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하시는 일도 있지만 반대로 사단도 우리 속에 많은 일을 하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너 안 되면 어떡할래?’ 두려움을 주는 거예요. 물론 우리는 성경을 통해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두려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아 이건 하나님이 주시는 게 아니고 사단이 주는 것인데 여기에 내가 매일 필요가 없구나.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겠구나.’ 벗어나면 아무 것도 아닌데 우리 마음이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그 두려움이 일을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걸 자꾸 막게 된다는 거지요.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예수님의 마음 하나를 받아들인 게 아니라 예수님의 전체를 받아들여서 예수님이 살아서 우리 속에서 일을 하시게 되고 반대로 똑같이 사단이 주는 근심이나 염려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건 두려움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사단 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담대하게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서 내 죄를 사하셨다는 이 복음 하나를 받아들일 때 그 복음 속에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단이 주는 의심이나 두려움이나 근심이나 염려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면 그 염려나 근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단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또 역시 그런 어두움의 일들이 계속 되어지는 거예요.
아나니아가 땅을 팔았습니다. 사단은 그 마음속에 어떤 마음을 주느냐 하면 ‘땅을 팔았어? 참 잘했어. 그런데 혹시 너에게 앞으로 위기가 닥치면 어떡할래? 땅도 다 팔고. 아내가 갑자기 병원에 가게 되면 어떡할래? 네가 병들면 어떡할래? 늙으면 어떡할래?’ 그런 두려움이 아나니아 마음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여러분 사단은 우리가 누구든지 간에 두려움을 툭툭 던져 봐요. 밑져 봐야 본전이니까. 두려움이 먹히면 좋고 안 먹히면 말고. 사단은 그래요. 여러분 어부가 낚시를 던질 때 물어주면 좋고 안 물면 할 수 없고 그렇잖아요. 사단이 두려움을 툭툭 우리의 삶속에 던져요. ‘너 그러다가 대학 졸업 못할는지도 몰라. 너 그러다가 직장을 잃을는지 몰라. 너 그러다가 쫓겨날는지 몰라. 너 그러다가 가난하게 될는지 몰라.’
그러니까 우리의 삶속에 사랑하는 주님이 살아 일하시는데 주를 믿는 믿음이 있을 때 내 인생을 주님 앞에 맡기는 게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만 사단이 내 마음에 두려움을 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 두려움이 이제는 나를 끌고 일을 하는 거예요. ‘너 이제는 땅을 다 팔았어. 그거 바치면 좋아. 그런데 만일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어떡할래? 갑자기 며느리가 아기를 낳는데 난산을 하면 어떡할래? 돈이 필요할 건데. 너 병들면 어떡할래?’ 그 두려움이 마음에 들어오니까 이제 두려움이 일을 하는 거예요. 어떤 일을 합니까? ‘그런 일이 닥치지 않게 돈을 좀 남겨두자. 돈을 좀 감추자.’ 그건 아니니아 삽비라가 돈을 감춘 게 아니라 두려움이 돈을 감춘 거예요. 두려움이, 근심이, 염려가 그것들이 하나님 아닌 쪽으로 내 마음을 끌어가서 그런 일들을 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나니아가 아내와 더불어 그 돈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아니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사단이 내 마음에 넣어주는 두려움을 받아들일 때 내 마음은 사단으로 가득하고, 예수님 내 속에 넣어주신 그 복음을 받아들일 때 내 마음은 주님으로 가득하고.
아주 단순한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그 복음 하나를 내 마음에 받아들일 때 그 때 주님이 내 마음에 영원히 같이 계시면서 나를 이끌고 인도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말씀 하나 복음 하나 마음 하나 받아들일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사단이 주는 마음 하나 받아들일 때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사단이 주는 두려움이나 사단이 주는 의심이나 사단이 주는 근심이나 사단이 염려나 불신을 내게 줄 때 “사단아 지금 내 마음에 두려움이 일어나는데 그게 누구로부터 온 거냐?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지? 사단아 난 네 것 안 받아. 난 두려워 안 해. 난 옛날엔 너한테 속았는데 이건 아니야. 두려워하는 마음은 주님이 주신 게 아니라고 했어.” 내 마음에 거부를 해야 합니다. “사단아 물러가. 난 두려움에 잡히지 않을 거야. 난 네 편 아니야. 난 예수님 편이야.”
아나니아는 삽비라와 함께 내가 이 땅을 팔아가지고 주님 앞에 드리는 건 좋은데 만일에 내가 땅을 팔아서 주님 앞에 드린 뒤에 내게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사고가 나면 어떡하나? 그런 염려, 두려움을 받아들인 거예요. 그 두려움을 아나니아 삽비라가 받아들이니까 그 두려움을 뒤에서 조종한 사단을 받아들인 건데 “사단이 어찌하여 네 마음에 가득하여!”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어찌하여 주님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사단이 주는 두려움을 받아들이면 “어찌하여 네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여!”
여러분 어떤 아가씨가 좋은 신랑감을 만나 약혼을 했는데 지나가는 남자가 “아가씨, 나하고 식사하러 가요. 아가씨, 나하고 데이트 해요. 아가씨, 나하고 여행가요. 아가씨, 나하고 호텔에 가요.” 약혼한 남자가 있는 여자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그 여자하고 절대 결혼하지 말아요. 한 평생 골치 아파요. 내 사람이 아닌 거예요. 나하고 약혼한 여자가 나하고 약혼을 하고 결혼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아가씨, 나랑 식사해요. 나랑 커피 마시러 가요. 나랑 여행가요. 나랑 호텔에 가요.” 그럼 뭐라고 그러겠어요? “이 남자가 어째 돈 남자 아니야? 여보, 옥수씨, 저 남자가 나하고 놀러가재요. 버릇 좀 고쳐줘요.” 그게 당연한 거예요.
내가 예수님과 결혼했는데 사단이 같이 점심 먹자고 하면 같이 먹고, 사단이 같이 데이트 하자고 하면 데이트 하고, 사단이 같이 여행하자고 하면 여행하고, 사단이 같이 호텔에 가자고 하면 호텔에 가고, 그게 무슨 그리스도의 신부냐는 거죠. 사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때 “나는 예수님과 결혼한 사람이야. 너하고 상관이 없어. 난 네가 주는 두려움 안 가질 거야. 예수님이 주시는 것 가질 거야. 난 네가 주는 불신 안 가질 거야. 염려 안 가질 거야.” 그게 주님의 사람이라는 거죠. 그럴 때 사단이 “박옥수야 어찌하여 성령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내 말을 듣지 않고 예수의 말을 듣느뇨?”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아나니아 삽비라는 주님 안에 있다고 하면서 사단의 말을 받아들인 겁니다. 사단이 주는 두려움을 받아들인 겁니다. 그가 주는 두려움을 받아들여서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여러분 우리는 우리 마음에 사단을 받아들이는 게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는 그게 죄가 아니라 사단이 주는 마음을 받아들일 때 그때 우리는 벌써 사단과 마음을 합치는 게 되어버립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과 똑같이 사단이 주는 마음을 받아들일 때 사단과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어찌하여 네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게 되었습니까? 사단이 주는 그 두려움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 두려움이 올지라도 ‘이건 주님이 주신 게 아니야. 사단아 물러가.’ 여러분 마음에서 거부하고 그렇게 말씀을 하십시오. 사단에게 잡히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성령에 잡혀서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마음에 가득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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