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장 2절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어려운 일들이 있고 적막한 일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제가 어제 제주도 감귤 축제에 갖다와서 저녁에 그라시아스 칸타타 리허설을 어제 했는데 거기 참석하면서 내가 뭘 느꼈느냐 하면 `이야 이런 우리 그라시아스를 하나님이 참 복을 주셔서 지금까지 잘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또 제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일을 하다보면 늘 그런 걸 느끼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막막하고 어렵고 어제 저녁에도 칸타타 준비하는 걸 볼 때 여러 가지로 어려운 부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조명이나 의상이나 곡 선정이나 참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는데 참 이런 우리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칸타타 결과를 보면 너무너무 은혜롭고 복되게 해마다 하셨는데 이런 우리를 통해서 올해도 크리스마스 칸타타가 너무 복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 너무 감격스러웠다는 거지요.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할 때 마르다는 일을 보고 있었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이 이야기가 바로 요한복음 12장 2절 바로 앞장에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고 통곡하고 고통하고 하는 그런 장면에 바로 이어서 12장에 이런 걸 보면 너무너무 다르다는 거지요. 그래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참 자주 있습니다. 11장을 볼 때 절망적이고 이젠 끝장이 난 것 같고 그들은 통곡 속에 슬픔 속에 있었는데 조금 넘어서 12장을 보니까 예수님의 잔치에 참석해서 함께 음식을 먹고 앉아있는 나사로를 볼 때 얼마나 놀랍습니까? 나사로만이 그런 게 아니지요. 마리아나 마르다도 그렇겠지요.
우리가 어려울 때 힘겨울 때 절망스러울 때 우린 그 어렵고 힘겹고 절망스러운 그 사실만을 보고 고통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한다는 거지요. 저희들이 처음에 IYF를 시작할 때 참 어려운 일들이 많았는데 지금 IYF가 되어가는 걸 볼 때 너무 은혜롭고 감사하더라는 거지요.
오늘 저녁에 제가 조금 전에 장년회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구본이 비뚤어져 있잖아요. 23.5도. 그래서 겨울에는 남위 23.5도에 태양이 머물고 여름에는 북위 23.5도에 태양이 머무는데 어느 초등학교에서 장학사 선생님이 학생을 보고 "애야 지구본이 왜 비뚤어졌지?" 그러니까 "내가 안 그랬는데요?" 그랬다고 그러더라고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담임 선생님한테 "담임 선생님 이 아이가 지구본이 왜 비뚤어졌느냐고 물으니까 내가 안 그랬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아이구 장학사님 죄송합니다. 잘 모르셔서 그런데요, 그 애는 정말 그런 일을 할 애가 아닙니다." 그 아이는 참 얌전해서 지구본을 비뚤게 만들 애가 아니라고. 장학사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제 교장 선생님께 이야기를 했어요. "아니 이 아이가 지구본이 왜 비뚤어졌느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안 그랬다 그러고 담임 선생님도 이렇게 말하는데 교장 선생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니까 교장 선생님이 "아 원래 국산이란 게 좀 그렇습니다. 앞으로 저희들이 예산을 좀 들여서 똑바른 걸 사도록 하겠습니다."
너무너무 재미있는 이야깁니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기울어지게 했습니다. 만일에 23.5도가 안 기울어졌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적도 근방은 일년 내내 푹푹 찌는 더위고 북극은 춥고 남극도 춥고 진짜 사람이 못 살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울게 했을 때는 기울어져야 돼요. 하나님이 곧게 했을 때는 곧아야 하고 하나님이 굽게 했을 때 굽어야 돼요. 하나님이 팔을 굽게 했는데 안 굽혀봐요. 이거 얼마나 불편한가.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사로를 죽게 했을 때 하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을 때 하나님에 의해서 이런 세계를 알았더라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실망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지요.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정말 우리는 그래요. 조금 더 앞을 내다볼만한 그런 시야가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 좋으면 좋은 거예요. 현재 나쁘면 나쁜 거예요. 내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어렵게 하신 걸 모른다는 거지요.
그러기 때문에 나사로가 정말 이 12장 2절에 있는 이런 나사로를 11장에서 볼수만 있었다면 무슨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11장에서 나사로가 무덤에 가 있는 그 나사로를 보고 우린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주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11장에 앉아서 12장이 보이는 거예요. 믿음의 눈으로 보면. 믿음의 눈으로 보면 정말 그 11장에서 12장이 보이는 거예요. 믿음으로 요셉은 죽을 때 자기 해골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더라고요. 왜? 요셉은 정말 애굽에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가서 가나안 복지에 가게 될 걸 믿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기 해골을 가나안 땅으로 가져가라고 이야기했다는 거지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보지 못한 세계를 보는 것처럼 바라고 믿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란 것은 제가 늘 이야기하듯이 눈먼 소경은 길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뒤에야 `여기 돌부리가 있구나.` 웅덩이에 빠진 뒤에 `여기 웅덩이가 있구나.` 그렇게 안다는 거지요. 그러나 눈을 뜬 사람들은 발이 돌부리까지 가기 전에 미리 돌부리가 있는 걸 본다는 거예요. 여러분 눈을 뜬 사람은 웅덩이에 빠지기 전에 미리 웅덩이가 있는 걸 본다는 거지요. 그러나 소경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뒤에 `아 여기 돌부리가 있구나.` 웅덩이에 빠진 뒤에 `아 여기 웅덩이가 있구나.` 소경은 그게 소경이라는 거예요.
영적 소경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재까지 앞의 것을 믿음으로 보지 못한 것은 소경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앞을 본다는 것입니다. 자 똑같이 나사로가 죽었는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 네 오라비가 살리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절에 있는 나사로를 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요한복음 11장에서 12장에 있을 나사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하는 거라는 거지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간에 그 문제를 해결할 주님을 바라보면 염려하고 두려워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린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는 차디찬 무덤에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였는데 요한복음 12장의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잔치상에 앉아서 즐기는 그런 나사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요한복음 11장에서 12장 이 세계를 보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가능하지 다른 걸로 가능치 않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면 눈이 뜨여집니다. 지금 이 형편, 이 모양만 보이지 아니하고 우리 속에 역사하는 주님을 보고 바울은 그 믿음의 눈을 가지고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가 있었고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 믿음의 눈을 가지고 현재를 보지 않고 장차 이룰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눈으로 내가 힘든 이 형편 말고 하나님 나를 어떻게 바꾸실지 거기에 기대를 두고 믿음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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