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6장 23절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이번에 제가 대구 체육관에서 여호수아에 있는 기생 라합에 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면서 기생 라합의 위치에 깊이 들어가서 라합을 생각하는 동안에 굉장히 제 마음에 은혜가 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숨긴다는 그것도 마음속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겠고 정탐군에게 약속을 받아내서 창에 붉은 줄을 매달고 온 가족들을 모으는 그런 일들이나 그 다음에 라합이 정탐군이 가고 난 뒤에, 결혼을 약속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옛날처럼 기생으로서의 술을 팔고 몸을 팔고 그랬을까? 절대 그렇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되거든요. 정탐군이 라합과 결혼을 약속하고 갔고 다시 여리고가 멸망을 당하는 정탐군이 돌아올 그 기간 동안에 라합의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 가운데 제 마음에 참 은혜가 되는 것이 많았는데, 라합이 틀림없이 이젠 기생노릇을 그만했을 겁니다. 옛날처럼 남자들이 찾아와도 돌려보내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네가 미쳤냐? 정신이 있나, 왜 돈 안 벌고 그러냐?” 그런 비난도 받았을 거고 그 다음에 자기의 아버지나 오빠나 언니나 이런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그 오빠나 언니가 뭐라고 했을까? “야 너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야, 이스라엘 사람이 미쳤다고 여리고 사람하고 결혼할 것 같으니? 더구나 너는 기생인데 어떤 남자가 이스라엘에 예쁜 처녀들이 많은데 다 두고 너 같은 기생하고, 뭇 남자하고 지낸 기생인 너를 사랑하겠냐?”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라합의 마음이 어땠을까? 틀림없이 누가 생각해도 “야 너 꿈꾸지 마. 김치 국물 마시지 마. 그 남자가 살라고 너한테 그랬겠냐? 그 남자가 너 사랑 안 할 거야.”
그런데 라합의 마음속에 두 가지가 있었지요. 첫째로는 살몬, 정탐군하고 약속의 말씀이 있었고 두 번째로 자기가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약속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라합, 나는 당신을 참 사랑해요. 라합, 나는 당신하고 결혼하기를 원해요. 잠시만 기다려줘요. 이스라엘이 쳐들어올 때 당신은 정말 창에 붉은 줄을 매세요. 그리고 가족들도 다 거기에 모여 있으세요. 그럼 내가 당신들을 구원해줄 테니까.” 라합이 정탐군에게 받은 분명한 약속이 있고 두 번 째로 라합이 생각을 해보면 ‘이야 그건 아닌 것 같애. 나 같은 인간에게 뭣 때문에 그 사람이 나 같은 인간하고 결혼하겠어? 아닐 것 같애.’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기생이라는 것과 또 자기가 여리고 성 사람이라는 것과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정말 그 정탐군이 자기하고 결혼한다는 건 절대 믿을 수 없는 일 같이 느껴지는 거지요.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하나님께 받은 약속이 있고 또 우리의 생각이 있는데 정말 살몬이 라합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보통 사랑이 아니라 참 크고 뜨거운 사랑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이라면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내 생각으로 줄여서 상상해서 볼 때 이해가 안가기 때문에 믿어질 수가 없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라합이 자기 생각을 믿거나 형편을 본다면 ‘아이고 나 같은 기생이 뭐... 잠시 며칠동안 내가 꿈꾸다 말았다. 꿈 꿀 동안에 행복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더라. 난 기생인데 나 같은 게 뭐...’ 그런 쪽으로 자기 생각이 흘러갔을 거라는 거지요. 자기 생각이 그렇게 흘러갔다면 자기 가족이나 친척들을 자기 집에 데리고 왔겠느냐 말입니다. 그건 말이 안 된다는 거지요. 결국 다 멸망을 받고 ‘아이고 불은 줄 무슨 소용 있나?’ 떼어버렸다면 전부다 멸망을 받고 말았을 거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 성경을 보면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라합만 그런 게 아니라 정탐한 소년도 집에 가서 “아버지 나 결혼할래요” “누구랑?” “라합이라는 여자예요.” “어 라합이 누군데?” “예, 여리고 성에 사는 여자예요.” “아 그래 뭐하는 여자냐?” “기생이예요.” “뭐? 안 된다. 이놈아. 절대 내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안된다.” 아마 그 정탐한 살몬의 부모들도 다 반대했을 거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들은 서로가 약속의 말씀을 살몬도 마음에 두고 있었고 라합도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거지요.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 때 살몬이 제일 먼저 여리고 성으로 뛰어들어갔을 거예요. 그리고 붉은 줄을 맨 집을 보고 “맞아. 저 집이야. 내가 저 창으로 뛰어내려왔어.” 막 뛰어들어가서 제일 먼저 가족들을 다 이끌어 냈다는 거지요. 살몬만 그랬겠느냐? 라합도 살몬의 약속을 믿고 주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형편이나 그런 걸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살몬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에도 항상 두 가지가 작용을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내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내 생각으로 더듬어서 제거나 어떻게 비교가 안 되기 때문에, 내가 현재 인간들하고 살면서 경험한 그 생각의 잣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나 역사를 젤 수 없기 때문에 내 생각을 가지고 보면 절대 그게 맞지 않다는 거지요. 절대로 맞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그 약속에 책임을 지고 계십니다. 신구약 66권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거기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그 신구약 66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을 때 잘못되게 일어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책임이지 우리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약속을 보면서 ‘이 말씀이 이렇게 안 되면 어쩔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추리해 보면서 내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생각으로 흘러간다는 거지요.
기생 라합이 살몬에게 받은 그 약속으로 마음이 흘러갈 수가 있고 자기 생각으로 흘러갈 수가 있어요. 자기 생각으로 몇 번 생각해요. ‘아이고 나 같은 기생이.. 난 기생이야. 난 안 돼. 왜 그가 날 사랑해? 난 잊어야 돼. 이건 말이 안돼.’ 아마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 6장 23절의 이 일은 살몬인 정탐도 약속을 이루려고 마음에 갖고 있었고 기생 라합도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서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그 역사를 이룰 수가 있었다는 거지요.
현 여러분들이 사는 삶 속에도 먼 어느 시대의 역사를 잇는 삶을 여러분이 계속하고 있는데 라합이 어떤 인간의 생각을 갖지 아니하고 그 약속을 믿음으로 했을 때 영광스럽게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온 것처럼 여러분 우리가 사는 모든 삶속에서 내가 보고 느끼는 내 형편이나 그것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여러분이 라합처럼 하나님의 그 사도행전 역사에 정말 빛나는 그런 귀한 일을 이루는 사람들이 될 거라는 거지요. 큰일을 하려고 생각지 말고 현재 여러분 앞에 있는 많은 인간적인 생각들을 다 지워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을 여러분 마음에 믿는 약속만을 의지하는 그런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능력으로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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