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형제님께서 아들 딸들에게 쓰신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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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아빠는 어제 밤 너희들이 가정집회 때 창세기 5장을 읽으면서 킥킥 웃었던 이유를 알고 있다. 옛날의 아빠도 그랬으니까.
아마도 너희들은 킥킥 웃는 것이 미안해서 ‘성경 말씀이 뭐이래?’ 하고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냥 읽으면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이 창세기 5장이지.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사람들의 이름이 좍 나오는데다 계속되는 동사는 살고, 낳고, 살고 낳고, 죽고니 말이다.
감동이 되는 좋은 글귀나 어떤 놀라운 사건도 없고,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단지 그들이 살고, 낳고, 죽었다라고 씌여진 족보.
하지만 누림아, 들림아, 창세기 5장은 아주 놀라운 기록이란다.
자세히 읽어보면 <살다>라는 낱말이 각 사람에게 두 번씩 사용되었고, <낳다>라는 낱말은 세 번씩 사용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아담은 123년을 살고 ‘셋’을 낳았으며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살며 자녀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의미를 알겠니? 이것은 창세기 5장에 있는 사람들이 다만 살고, 그리고 낳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낳는 것은 열매 맺는 것과 같은 뜻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얘들아,
우리는 이 창세기 5장의 사람들이 정말 의미 깊게 살고, 낳았으며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낳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 갑자기 그리스도가 언급되느냐고?
이 창세기 5장을 누가복음 3장의 족보와 함께 놓고 보면 결국 이 족보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께 이르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란다. 놀랍지 않니?
그러나 슬프게도 여기 살고, 낳고 외에 다른 낱말이 하나 있구나. 그것은 그들이 살고, 낳고 그리고 죽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살고, 낳는 열매 맺는 역사가 있었지만 죽음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다니..... .
죽음은 사람의 타락의 최종 결과란다.
아담의 타락 이후 사망은 계속해서 역사하고 죽이고 있으며, 사람들은 매일 그 위협아래 있다. 오늘 구원을 받은 우리까지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사망의 죽임 아래 있지 않느냐.
하지만 모두가 사망 아래 있었던 것은 아니란다.
다시 5장을 읽어보렴. 10 세대의 기록 중에서 한 세대는 사망에서 벗어난 것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래, 바로 에녹이다.
21절에서 2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구나.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살았고, 낳았고, 하나님과 동행했고, 낳았으며 죽지 않았다. 하나님은 에녹을 데려 가셨다.
하나님이 왜 그를 데려가셨다고 생각하니?
히브리서 11장 5절에는 정확한 답이 있단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목적은 그로 죽음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망은 그를 죽이는 역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망의 죽임을 정복한 에녹!
성경은 그에 대해 그다지 많이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창세기, 히브리서, 유다서에 계시된 것만으로도 그의 생활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단다.
유다서는 에녹이 살았던 환경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유다는 그 시대의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를 묘사하면서 4번이나 <경건치 않은> 이란 낱말을 사용했다.
그만큼 그 당시 모든 상황, 환경,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이 경건하지 않았다는 거지.
하지만 에녹은 경건했으며, 거룩한 생활을 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경건치 않은 세대를 심판하시리라는 예언을 했다.
유다가 14절에 에녹이 ‘성도들(거룩한 자)’이라는 놀라운 단어를 사용하며 예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라.
에녹이 홍수에 대한 예언을 한 것은 65세 때였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이 <저가 죽을 때 그것(홍수)이 오리라>라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그러니까 에녹은 자기 아들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음으로 장차 올 홍수의 심판을 예언한 거란다.
에녹의 예언은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이루어졌다. .
한번 계산해 볼래?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으며, 노아가 600세 되던 해 홍수가 왔다. 그러니까 홍수는 에녹이 예언한지 969년이 지나 이 땅에 임했다. 정확하게바로 므두셀라가 죽은 해였지.
에녹은 예언하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고, 그리고 휴거 되었다. 에녹은 최초로 휴거 된 사람인 게야.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며 그분이 상주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는 또 이세상의 심판이 오리라는 예언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휴거 되기를 기대한다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단지 그것이 비결이란다.
너희들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지 않니? 그렇다면 너희는 보폭을 하나님께 맞춰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한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그게 뭐 다른 말인가요?”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르다. 아주 다르고 말고.
너희들 기억하니?
초등학교 시절 아빠랑 산책할 때마다 너희들은 “아빠, 천천히 걸어가요.“하고 말했지.
그때 나는 너희들과 동행하기 위해 천천히 걸어야 했다.
그러나 아빠가 회사에 일찍 출근할 일이 있는 날은 너희들은 아빠와 같이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뛰어야 했지. 아빠의 빠른 걸음에 맞추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는 너희들이 아빠와 동행한 것이다. 알겠니?
사실 하나님이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락하고 있을 때란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는 말씀을 기억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때 주님은 그들과 동행하셨다.
맞다. 주님이 그들과 동행한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그들을 다시 예루살렘에 데려오시기 위해 그들과 동행했던 것이다.
많은 때 하나님은 너희들이 오락실에 가거나 극장에 갔을 때, 또 노래방에 갈 때 너희들과 동행하신다. 너희를 하나님께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
누림아, 들림아,
아빠는 소망을 가지고 너희 이름을 누림이와 들림이라고 지었다. 그 이름을 가진 사랑하는 딸과 아들인 너희들이 주 예수를 누리고 들림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름을 같이 짓던 엄마도, 나도 들림 받기를 소망했기 때문이었고.
지금 우리는 에녹이 살던 그 시대보다 더 경건치 않은 악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말세.”라고들 말하고 있는 것을 너희들도 알 게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아이들아,
아빠는 너희가 창세기 5장의 기록에서 해답을 얻기 바란다.
우리 모두 에녹처럼 온전히 사망에서 옮겨지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 하나님과 동행하자.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는 그분이 계심과 또한 상주시는 분임을 믿어야만 한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고, 믿음으로 그분과 동행할 때, 우리는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
창세기 5장이 노아로 끝나는 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
노아라는 이름은 위로, 안식을 뜻하기 때문이란다.
다시 너희들이 창세기 5장을 읽는다면 이제 웃음 대신 간절한 기도가 나올 것이다.
“주 예수여, 우리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