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3장 2절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지난 2003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놀라운 많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걸 제가 다 기록해 놓지는 못했지만 정말 너무 놀랍고 감사했는데, 때로는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참 내가 당황하고 황당한 일들을 당하고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서 김충환 목사가 세상을 떠날 때 난 도저히 그걸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중국 칸타타가 취소되었다는 것도 ‘이건 꿈이야.’ 제 속에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었을 때, 저는 이번 중국에서의 칸타타가 취소되면서 그라시아스 합창단과 호텔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모임 전에 우리가 찬송을 불렀어요. 고요한밤 거룩한 밤을 부르는데 그때 이야기를 하려면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합창단들이 다 울었어요. 단장님도 우셨지요? 우리가 그렇게 울었는데 제가 말씀을 전하고 그러면서 내 마음에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북경에서 우리가 돌아오는 날 난 마음에 ‘눈물을 씻어야 겠다. 울음을 끝내야 겠다. 슬픔을 끝내야 겠다.’
그리고 제가 성경을 대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을 읽으면서 하나님 내게 참 많은 소망을 주었고 그래서 내가 북경에서 좀 슬프게 울고 했지만 돌아오는 그 순간 비행기를 타면서 내 마음에서는 이상더 슬픔이 내 마음 안에 머물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잊어버리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 그 기쁨이나 감사함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내놓고 보면 칸타타가 무산되었지만 그라시아스 합창단 한사람 한사람에게나 우리 선교회에 굉장히 많은 축복이 되고 은혜가 된 걸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을 겪을 때가 있는데 그 시련 속에 깊이 빠지면 자꾸 우리 마음이 시련 속에, 슬픔에 빠지면 슬픔 속에, 고통 속에 빠지면 마음이 고통 속에 자꾸 빠져들어간다는 거지요.
오늘 읽은 창세기 23장 이야기나 아니면 사무엘상 30장에서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 전쟁터에 갔다가 시글락에 돌아오니까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다 불지르고 남녀와 어린 아이들을 다 사로잡아 갔었습니다. 그때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울기력이 없도록 울었다” 하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울기력이 없도록 울면서 그들 마음에 슬픔이 커진 겁니다. 처음에는 그냥 자식이 없고 집이 불탔고 슬퍼서 운 건 사실인데, 울면 울수록 슬픔 속에 자꾸 젖어 버리니까 결국 이들은 어디까지 달려가느냐 하면 “다윗을 돌로 쳐죽이고 우리가 떠나자.” 거기까지 도달하고 기력을 다 잃어버리더라는 거지요.
오늘 읽은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가 죽었습니다. 2절에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그러면서 이제 사라의 장지를 위해서 헷사람에게 구하는 그 이야기가 창세기 23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물론 자기 아내 사라가 죽었으니까 슬프지요. 그러나 우리가 바꾸어서 생각한다면 사라의 죽음 앞에서 아브라함은 감사해야 할 조건들이 너무너무 많은 거예요. “당신은 죽었지만 그렇게 낳고 싶어했던 아들도 낳았고 또 많은 재산도 가졌고 또 이렇게 행복하게 살다가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죽게 되었는데 참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이 감사해야 할 조건들이 참 많고 감사를 해야하는데 아브라함이 아내가 죽은 그 슬픔 속에 자기를 빠뜨려 놓아버렸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이 슬픔이 오거나 고통이 오거나 원망이 오거나 괴로움이 올 때, 그것이 그냥 나를 사로잡아서 끌고 다니도록 내어버려 두지를 말라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슬픔에 계속 끌려다니면 슬픔이 더 커지고 고통에 끌려다니면 고통이 더 커지는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나를 끌어가도록 내버려두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것이 바로 다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 속에 젖으면 보이는 게 고통만 보이고, 느껴지는 게 고통만 느껴지고, 부딪혀지는 게 고통만 부딪혀지니까 고통이 점점 내 마음 안에 커지는 겁니다. 여러분 슬픔이라는 것은 여러분 마음에서 느껴지지 않으면 절대 슬픔이 안되고 괴로움이라는 것도 마음에서 느껴지지 않으면 절대 괴로움이 안되며 고통이라는 것도 역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이 그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수없이 많은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고통과 슬픔 속에 빠져서 다른 은혜와 축복을 볼 수 없도록 만들어버렸다는 것이지요. 만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서 돌이켜 보면 아내가 127세를 살았으니까 살만큼 살았고 그 동안에 하나님이 많은 축복을 주었고 은혜를 주었고 감사할 조건들이 너무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젖다 보니까 감사할 조건들을 다 잊어버렸을뿐 아니라 믿음까지 다 잃어버렸으니까 이제는 인간들 앞에 와서 굽신굽신 하면서 장지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구하지 않고 믿음없이 그런 모양의 아브라함을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슬픔 속에, 고통 속에, 낙심 속에, 괴로움 속에 빠지도록 사단은 많은 조건들을 여러분 속에 갖다준다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거기서 누구든지 괴로울 때 괴로워해야 하고, 슬플 때 슬퍼해야 하고, 고통스러울 때 고통스러워해야 하는데, 여러분이 거기서 마음을 바꾸어서 반대로 다른 부분을 한번 보자는 거지요.
우리가 밥을 먹을 때 그냥 맨밥만 먹으면 싱거워서 소화가 잘 안되기 때문에 밥을 한 숟가락 떠먹고 김치를 하나 집어먹으면 맛이 달라지잖아요. 밥을 한 숟가락 먹고 된장국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 밥맛이 달라지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고통과 슬픔만 씹지 말고 괴로움과 아픔만 씹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간증들, 그 축복들을 한번씩 같이 씹어보면 고통이 아무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하는 사람들이 왜 절망하는 줄 압니까? 신앙을 못하는 사람들이 왜 신앙을 못하는 줄 아십니까? 고통 한 곳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슬픔 한곳에 젖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참 신앙인들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아 등이 찢어지고 고통 속에 있을 때 그가 그곳에만 마음이 집착되어 있으면 실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까 거기서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이 정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막 피곤하고 지칠 수 있습니다. 말라리아에 걸려서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하나님은 고통만 괴로움만 주지 아니하시고 그 속에 기쁨도 감사할 조건들도 고통보다 몇배나 많이 주셨다는 거지요. 그걸 볼 눈이 없으면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잠시 여러분 눈을 돌려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어떤 것들인지 그걸 보고 그 기쁨과 감사로 고통을 이기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제목으로 슬픔을 이기고 달려간다면 여러분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힘있게 역사하실뿐 아니라 또한 여러분을 통해 귀한 열매를 맺게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Reply 윗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3개월이 지난 글은 덧글 입력이 불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