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5장 32, 36절
32절,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36절,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민수기 15장을 1장 처음부터 읽어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1절에서 26절까지 소를 잡고, 양을 잡고, 염소를 잡고, 또 소제를 드리고, 전제로 포도주를 붇고, 이런 제사를 드리는 이야기가 나오고, 또 마지막 부분에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하러 가다가 잡혀서 돌에 맞아 죽는 이런 두 가지 이야기로 민수기 15장이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갑자기 뭉클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소를 잡고, 양을 잡고, 수송아지를 잡아서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데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부분에 보니까 자기 생각을 따라 안식일에 나무를 하러 가다가 잡혀 돌에 맞아죽는 이런 이야기로 되어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전도하고, 그렇게 해야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마음을 같이해서 마음이 하나된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가 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의 길,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제사를 드리라고, 번제를 드리고, 전제를 드리고, 또 소제를 드리고,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 때에 그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자기 희생을 해가면서도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위해 희생을 당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만 거기에 마음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냐면 자기 욕망을 따라 저주를 받고 멸망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거지요.
쉽게 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단과 그 둘 중에 중간에 있을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아주 지혜롭게 행하는 줄 알고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니까 부담스럽고 안 따라가려고 하니까 어렵고 그러니까 예수님과 사단의 중간이 되어서 예수님 편에도 서지 아니하고 사단 편에도 서지 않은 줄 생각하는데 절대로 중간은 존재를 안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서지 아니하면 그건 바로 사단 편에 선 거지요.
저는 며칠 전에 우간다에 있는 이해영 선교사님 집에 전화를 해 봤습니다. 우간다 이해영선교사님 집에 전화를 하면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이해영 선교사님이 형제들하고 전도여행을 떠난 지 이틀인데 아직 소식이 없고 안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이해영 선교사님 자매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이 형제님은 너무너무 우간다에 온 걸 기뻐해요. 우간다가 너무 체질에 맞고, 아침에도 파인애플 먹으면서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이걸 어떻게 먹었겠나, 또 바나나를 먹으면서도요.`
그리고 매일 기뻐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제가 전화를 받으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냐면 난 아직까지 세상에 부러워본 사람이 없는데 이해영 선교사님 내외분이 그렇게 부러워요. 내가 나이 들면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는데 이 형제님이 먼저 가셨고, 또 거기 가서 어떤 일보다도 일보다 일 속에 깊이 젖어서 만족하고 기쁨으로 일을 할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제가 물어봤습니다. 말라리아에 안 걸렸습니까 하니까 `목사님, 이 우간다에는 모기가 너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저희 내외는 한번도 말라리아에 안 걸렸어요.` 그러면서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마음에 기쁨이 젖어있고 감사가 젖어있는 것을 볼 때 너무 기뻤습니다.
사역자들이, 선교학생들이나 복음 전도자들이나 똑같이 자기 마음을 다 쏟아서 주를 위해 드린다면 그 다음에 그 속에 주님의 역사를 보고 날마다 충만해 지는데,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릴 기회가 있지만 드리지 않고 육신의 욕망이나 정욕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은 달려가다보면 그것만으로 만족 안하고, 또 육신의 욕망으로 끌려가고 결론적으로 어느 쪽으로 흘러가냐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위치로 흘러가더라는 거지요.
민수기 15장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수없이 많은 기회를 1절에서 26절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런 제사를 드리고 난다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고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될 거라는 거지요. 그런데 똑같이 사역을 해도 어떤 사람은 힘들고 불편스럽고 원망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영 선교사님같이 인터넷도 안 되는 데서, 그 어려운 나라에서, 정말 모기가 많고 고통스럽고, 제가 그 집을 가 봤는데 완전히 진흙바닥에서 차가 지나면 먼지 나는데 자동차도 없이 살면서, 그런 삶을 살면서도 자기 자신이 주님 앞에 다 드리워졌으니까 내가 주님 앞에 쓰임을 받는 그 자체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직 거기는 예배당도 짓지를 못했어요. 그냥 자기 숙소 앞에다가 함석 몇 장 걸쳐놓고 사람들 열댓 명 앉혀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너무너무 기뻐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자기 욕망을 섬기는 사람은 위치가 좋다고 해서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욕망은 더 좋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또 더 좋지 못해 원망하고, 더 좋지 못해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정해봉 형제가 저한테 와서 간증을 했어요. 이번에 광주 은혜교회 예배당을 지으면서 좀 어려웠다고 하더라고요. 왜 어려웠냐고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거기 같이 일하는 배종근 형제하고 마음이 좀 안 맞아서 어려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정 형제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건 어려운 게 아니야. 공사할 때 가장 어려운 게 뭐냐하면 레미콘을 쳐야하는데, 돈이 없어 레미콘이 못 와서 다 해놨는데 레미콘을 못 칠 때, 그 때 어렵고, 그 다음에 공사를 다 해놨는데 잘못되어 다시 뜯어내야 될 때, 그런 때가 어렵고, 공사하다가 사람이 다쳐서 죽거나 다치고 그런 게 어렵지, 형제하고 사이에 일하다 마음 안 맞는 거, 그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그게 뭐가 어려운 거냐 하니까 그 형제가 웃고 말더라고요.
그렇습니다. 진짜 공사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 그걸 안 닥쳐보면 적은 것도 어려움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큰 주님 앞에 자신을 드려보지 않은 사람들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가기 때문에 주를 위해 적은 일을 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거예요. 간증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기도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러나 주님 앞에 자신을 드려본 사람은 내 자신을 다 드리고 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가난해지고, 주님 때문에 내가 빚을 지고, 주님 때문에 내가 병이 들고, 주님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주님 때문에 배가 고파도 절대로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민수기 15장은 두 가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하나님께 드려서 죽임을 당해 영광을 돌리는 그 죽음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가다가 돌에 맞아 죽는 두 가지를 민수기 15장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는 어떤 죽음을 선택해야겠습니까.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것만으로 만족을 삼으십시오. 나를 위하여 섬기면 끝도 없고 한도 없고, 결국은 육신대로 살다가 반드시 죽을 것인데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주를 위해 살 때 반드시 은혜가 넘칠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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