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모두 빌라델비아 교회시대에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강물을 따라
수십만명을 회심시킨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제목 : 무디의 거듭남 간증
무디 (D. L. Moody)
지난 11개월 동안 드와이트(무디의 이름)는
에드워드 노리스 컬크(Dr. Edward Norris Kirk)박사의
설교를 계속해서 들어왔다.
그 교회는 12년 전, 여타 큰 도시에 있는 교회의
엄격한 교리와 배타적인 면에 불만을 품은 보스톤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컬크 목사는 사람의 죄악 됨과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의 무능력함을 강조하였다.
그 목사는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믿는 사람들 각각의 친구가 되기를
갈망하심에 대해 말하였다.
한편 컬크 목사는 그러한 위대한 구원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였고, 심한 말로 그들을 비난했다.
지난 11개월 동안, 드와이트는 컬크 목사의 메시지와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의 가르침에 생각이 잠겨들면서,
자신이 영적인 싸움 중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죽기 직전에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생각했었다.
나는 폐병이나 중병에 걸려서 그리스도인이 되면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전까지 세상의 최고의 즐거움을 누리려 했다.”
컬크 목사는 영적인 것은 선택하고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는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선택이 믿음의 생활로 이끌려진다고 강조했다.
어린 드와이트는 목사의 말이 옳다고 느꼈지만
아직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할 수는 없었다.
그 후 4월, 마운트 버논 교회(Mount Vernon Church)에서 부흥회가 있었다.
그리고 1855년 4월 21일 토요일, 에드워드 킴볼은 다루기 어려운
한 주일학교 학생에게 그의 영혼에 대하여 말하겠다고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 그는 드와이트가 뒤 쪽에서 신발을 포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드와이트를 당황하게 하고 싶지 않아 지금은 되돌아 갔다가
편한 시간에 다시 오려고 거의 마음을 먹었다..
그 목사는 후에 이렇게 진술했다.
“일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가야할지 망설였다.
그리고 내가 이 소년에게 전도하면 그는 당황할 것이고 내가 돌아갈 때
다른 점원들은 내가 누구인지 물어볼 것이고,
그들이 내가 와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게 되면 무디를 놀리면서
내가 그를 착한 소년으로 만들려 했느냐고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지금 시도하여 한번에 끝내자고 마음 먹었다.”
"태양은 예전보다 훨씬 더 밝게 비췄고 마치 나에게 웃어주는 것 같았다.
보스톤 커몬(Boston Common)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나는 나무 위에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모든 새들이 나에게 노래를 불러준다고 생각했다."
신발가게 뒤에 있는 드와이트에게 가면서
그는 그의 손을 드와이트 어깨에 놓고 기대며 발을 신발 상자 위에 놓았다.
킴볼은 드와이트의 눈을 보며
"너를 사랑하시고 너의 사랑을 원하시며 반드시 너의 사랑을 얻으셔야 하는
그리스도께 너는 와야 한다."라고 말했다.
드와이트는 생각에서 발버둥쳤고,
결국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시켰다.
그는 킴볼의 권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나아왔다.
킴볼은 나중에
"나의 간청은 설득력이 적었지만 나는 진실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그 청년은 자신에게 임한 그 빛을 받도록 예비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즉시 보스톤의 신발 가게 뒤편에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렸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다음날 아침 방을 나올 때에 드와이트는 무한한 행복과 평강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 활짝 핀 웃음과 큰 갈색 눈에 반짝이는 신선한 생기는
새로 찾은 그의 기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태양은 예전보다 훨씬 더 밝게 비췄고 마치
나에게 웃어주는 것 같았다. 보스톤 커몬(Boston Common)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나는 나무 위에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모든 새들이 나에게 노래를 불러준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가 걷는 동안 모든 창조물이 그를 격려 하는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나는 어떤 사람을 향해서 증오하는 느낌이 없었고
모든 사람을 내 맘에 품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라고 회상하며 말하였다.
(하비, 무디, 영문판 p.28-30)
제목 : ?치만 니의 구원받은 간증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내 위로는 누님이 두 분 계셨다.
어머님이 누님들을 낳으셨을 때 나의 고모님은 기뻐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고모님은 연달아 딸 여섯을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풍습은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는 소홀히 여겼다.
때문에 어머님이 두 딸을 낳은 후 사람들은 어머님도 고모님과 같이
딸 여섯을 낳은 후에야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 어머님은 아직 분명히 구원받지는 않았지만
주님께 간구할 줄은 알았다. 어머니는 주님께,
"만일 당신이 내게 사내아이를 주신다면 그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결국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내가 태어났다.
훗날 부친은 나에게
"네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가 이미 너를 주님께 드렸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1920년, 십 칠 세 때 구원받았다. 구원받기 전 내 심중에는
큰 교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것과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길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받는 것은 어떻게 죄에서 구출되는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나의 전 일생과 연관되어 있었다.
만일 내가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다면,
나는 그분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분은 나를 죄로부터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구원하려 했다.
그 때 나는 구원받기가 두려웠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구원받으면
주님을 섬기는 일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이중적인 것이어야 했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한쪽에 제쳐놓고 구원만 원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주님을 믿으려면 양면을 다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방면을 다 포기해야 했다.
내게 있어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기쁨과 평강이 있었지만 구원받은 후의 기쁨과 평강이야말로
참된 것이었다.
1920년 4월 29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했다.
처음에 나는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믿지 않자니 마음이 불안하고 속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릎 끓고 기도하였다. 처음에는 기도할 말이 없었는데,
마침내 나는 내 앞에 많은 죄들이 놓여진 것을 보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일생 중에 이러한 체험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한면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보았고 또 한면으로는 구주를 보았다.
한면으로는 죄의 더러움을 보았고
또 한면으로는 주님의 보혈이 나를
눈과 같이 희게 깨끗이 씻을 수 있음을 보았다.
한면에서는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나는 저항할 길이 없어서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에 다른 사람이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면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날 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죄를 자백한 후 죄의 짐이 다 벗어지게 되자 나는 가벼움을 느꼈고
마음 속에 희락과 평강이 충만했다.
이것이 내 일생 중에 첫 번째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처음으로 기쁨과 평강을 체험할 때였다. 이전에도 기쁨과 평강이 있었지만
구원받은 후의 기쁨과 평강이야말로 참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홀로 내 방 안에서 빛을 보았고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주님께, "주여, 당신은 참으로 저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제목 : 허드슨 테일러의 거듭난 간증
이 모든 일들은 허드슨 테일러가 아버지의 책들에서 흥미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조용한 시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집을 비웠었고,
소년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집은 텅비어 보여서,
소년은 이야기 책 하나를 들고 지루한 얘기가 나오지 않는 한
계속 읽으리라고 생각하며 그가 좋아하는 낡은 창고의 한 구석으로 갔다.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있던 어머니는 토요일 오후 그의 외아들에 대해
특별히 부담이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을 떠나 혼자 가서 아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청했다.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있던 어머니는 토요일 오후
그의 외아들에 대해 특별히 부담이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을 떠나 혼자 가서 아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청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는 기쁜 확신이
마음에 가득 넘칠 때까지로 몇 시간이고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편 어린 테일러는 그가 집은 소책자를 읽고 있었고,
이야기가 더욱 진지하게 전개되어가면서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일"이라는 한 문장에 사로잡혔다.
누가 성령의 역사의 비밀을 설명할 수 있는가? 오랫동안 친숙했지만
경시해왔던 진리가 그의 생각과 마음에 다시 떠오른 것이다.
"왜 작가가 그런 단어들을 사용했을까?
왜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또는 화해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그는 물었다.
갑자기, "다 이루었다"는 글자에 빛이 났다. 다 이루었다?
무엇을 다 이루었나?
그의 마음은 "죄에 대한 완전하고 완벽한 화해"라고 대답했다.
"위대한 대속자가 이 빚을 갚았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우리의 죄 뿐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그런후 놀랍게도 분명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모든 일이 이루어졌으면, 모든 빚이 갚아졌으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한가지 그리고 유일한 대답이 그의 혼을 사로잡았다.
"무릎 꿇고 이 구주와 그분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영원히
그분은 찬양하는 것 외에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예전의 의심과 두려움들은 사라졌다. 우리가 회심이라고 부르는
놀라운 체험의 실제가 그를 평강과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새 생명이 그에게 왔다.
왜냐하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새 생명이 가져온 변화는 위대했다.
새로 발견한 기쁨을 어머니와 함께 나누기를 기다렸기에,
그는 어머니가 돌아오시자 가장 먼저 그녀를 반겼다.
"안다, 내 아들아, 알아", 어머니가 그 아들을 안고 말했다.
"네가 말하고자 하는 기쁜 소식으로 나는 2주 내내 기뻐하고 있었단다." (Howard, Spiritual Secret 16-188)
제목 : 앤드류 머레이의 거듭난 간증
요한 머레이(John Murray)와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둘 다 헌신적인 선교사 목사의 아들로서
건실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들 모두는 정통적인 성경신학을 공부했으며,
정통적인 성경신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들은 또한 건실한 그리스도인의 활동들과 단체에 그들 자신을 드렸다.
네델란드에서 그들은 사역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매우 탁월했다.
확실히 그들은 외견상으로 본받을만한
그리스도인의 성격을 갖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교육과 학식과 신념은 그들로
또 하나의 중요한 확신을 갖게 하였다.
그들은 "마음이 기묘하게 포근해지는 느낌"이 그들이
간절히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역사라는 참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비록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지만
사람이 또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외적인 활동이 아무리 선하고 경건하더라도
그것들이 새로운 출생의 깊고 내재적인 역사와 혼돈될 수 없다.
참으로 앤드류의 아버지는 앤드류가
유트레이트(Utrecht, 네델란드 남서부의 도시)로 가서 사역을 준비하겠다는
소식에 답할 때 이것을 염두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네가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것을 축하하고
주님께서 그분의 원함대로 너의 마음을 이끄시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기쁘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네가 너의 마음을 지금 뿐 아니라
영원히 그분의 소유로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끝까지 그분을 따라가리라 확신한다.
또한 천사들도 기뻐할, 당신의 아들이 거듭났다는 더 기쁜 소식을
부모님에게 전할 때 부모님의 기쁨도 마찬가지일거라 확신한다...
앤드류는 부모님과 요한 삼촌과,
그와 요한이 스코틀랜드에서 만난 전도자들로부터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될 때 임하는 은혜에 대한 분명한 체험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보게 되었다.
1845년 11월 14일에 그의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서 앤드류는
처음으로 그 기쁜 소식을 전했다.
사랑하는 부모님께
저는 오늘 또다른 동생이 태어난 소식을 담은 8월 15일의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습니다.
또한 천사들도 기뻐할 당신의 아들이 거듭났다는
더 기쁜 소식을 부모님에게 전할 때 부모님의 기쁨도
마찬가지일거라 확신합니다.
어떻게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를 되돌아볼 때
난 다만 아무것도 못 보았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지난 이 삼년 동안 긴 과정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죄인인 내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내어드렸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목 : 스펄죤의 구원간증
스펄젼은 이렇게 구원받았다
스펄전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는 적습니다.
아래의 그의 구원 간증은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일깨워줄 것입니
다
* * *
제가 젊었을 때, 약 5년간이나 심히 괴로운 마음의 암흑기를 격은 일이 있
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의 두려움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하면 저는 그와 동감인 동시에, 그를 깊히 동정하고 싶습니다.
그당시 내 마음의 하늘에서는 태양이 지워지고, 내가 지은 죄는 일체 소망
이 없는 자리에 나를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아십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에 이렇다 할 응답의 흔적조차 찾아본 적이 없었습니
다.
나는 성경 말씀을 두루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약속들은 더 심히 내 마음을 부담스럽게 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민의 특권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이론을 꾸며 설명을 해 보아도, 그 특권이 내 것이 될 듯
하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제 낙망의 원인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깨닫지 못하다!
나는 기독교국에서 태어났었고, 나의 양친도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
고 나는 그때까지 기독교 복음의 자유성과 단순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
다.
나는 내가 살고 있던 거리의 예배당을 두루 헤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복음이 온전히 설교되
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 교역자들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들 중 어떤 한 분은 하나님의 절대의 통치권에 대하여 잘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의 설교를 유쾌하게 듣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어찌하면 구원을 얻을까 하는 문제에 억매어 있던 불쌍
한 죄인인 나에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말이었습니다.
또 한 분은 항상 율법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땅을 갈기만 하고 씨가 떨어
지지 않으니 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수없이
읽고 들었으나
나는 여전히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던 것입
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만, 만약 하나님이 은혜롭게도 어느 일요일 아
침 대단히 심한 눈보라로 나의 예배당 가는 길을 막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암흑 속에 있지나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날 아침 나는 눈에 길이 막혀서, 우리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보잘 것 없
는 조그만 한 교회에 불가불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회중은 모두 열 두 서넛밖에 없었으며 목회자도 안 나왔습니다. 아마 눈에
길이 막혔던 모양이었습니다.
이윽고 한 초라한 사람 ― 양복직공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구두깁는 사람같
아 보이는 이가 강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 사람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본문을 외어대는 것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딴 소리는 할 재능이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본문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이사야 45장 22절이었는데
이 사람은 본문을 온전히 읽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
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경 봉독을 들었을 때 제 생각에 그 말씀에는 제게 대한 어떤 소망
이 감취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였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이 본문은 매우 간단한 말입니다.
여기에는 `앙망하라` 하였습니다.
바라보는 것은 뭐 힘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볼려고 다리를 들거나 손가락을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보
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는 법을 배우러 대학에 가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아기도 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바로 이와같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나를 바라보라`하였습니다.
아,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자기를 바라봅니다. 그건 봐야 소용없습니다.
여러분을 바라봤댓자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바라봤댓자 시원한 일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안됩니다. 예수를 자주 바라보십시오.
예수는 `나를 바라보라`하셨습니다.
또 어떤 이는 `나는 성령이 역사할 때까지 기다리지`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나를 바라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선량한 직공은 다음과 같이 소리쳤습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큰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보라, 나는 죽어 장사되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살아났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승천했다!
나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았다!
오오,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여기까지에 겨우 한 십분동안을 소비하고 나서 이 설교자는 밑천이 떨어지
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강단 바로 밑에 앉았던 나에게 시선을 던졌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그렇게 조금 모였기 때문에 그는 내가 처음 나온 사람인 줄
을 알아 차렸던 모양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예수를 바라보고 우리의 연약함을 보지 말자"
우리의 연약함을 한탄함으로써 우리가 강해질 수 있을까?
오직 예수를 바라볼 때 그의 능력이 우리 속에 역사하여 그의 찬송이 우리
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게 된다.
"예수를 바라보고 우리의 죄를 보지 말자"
죄의 생각은 사망을 가져올 뿐이요, 예수를 사모함만이 생명에 이르게 한
다.
이스라엘 백성을 낫게한 것은 그의 상처를 들여다 보는 일이 아니었고 다
만 구리뱀을 쳐다 보는 일이었다.
"예수를 바라보고 우리의 공로를 보지 말자"
눈앞의 세상 일에 너무 정신을 기울임으로써 주님의 의를 망각하지 말자.
손은 항상 바쁘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비어두자. 때를 따라 주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도록.
그는 나를 향해 입을 열어 "청년, 당신은 왜 그리 가련한 모양을 하고 있
소?"하고 물었습니다.
물론, 나는 가련했지만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강단 위로부터 내 개인의 모
습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 한 마디는 내 마음을 쳐 올렸습니다.
그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청년이 이 성경 본문을 순종하지 않으면 언제나 가련할 것이고 죽어서도
가련할 것이요.
그러나 이제, 이 시간에 이 성경을 순종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소"
그는 한층 소리를 높였습니다.
"청년이여, 예수를 바라보라! 지금 바라보라!"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리에서 놀라 일어났으나, 그러나 그 때 나는 예수를 바라보았던 것입니
다.
그 순간 구름은 걷히고, 나는 햇빛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감격에 넘쳐 구주의 귀하신 보혈과 단순명확한 그
리스도의 복음을 찬송하고 싶었습니다.
아아, 그 누가 이 진리를 좀 더 일찍이 나에게 깨우쳐 주었더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