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는 의인을 다 읽었다.
위인전은 그 삶을 본받아 훌륭한 삶을 살게 하려는데 목적이나 성경은 반대로 창기 세리 방탕한 자가 구원의 길이 없어 절망이 되어 주 예수가 찾아와 만나주어 구원을 얻는 생명의 말씀이다 등에 은혜 받았다.
박 목사님은 훌륭한 사모님을 만나 사랑에 대하여 그렇게 쓰셨지만 이는 예외의 경우에 속하며 이혼자 등등의 대부분이 불행한 자에게는 은혜가 되지 못한다
사랑에 대하여 다음이 보여져 힘을 얻었다.
성경에서 사랑이란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여기서 중요한 건 주어가 우리나 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김대성님도 같은 말을 보내주어 반가왔다.
교회당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도 사랑을 웨치나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사랑을 향한 마음이 있다고 사랑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얼굴도 못보고 집안대 집안으로 결혼한 우리 조상들은 여자는 한의 시대의 사랑이 아니라 당사자의 감정을 내세우는 지금 시대의 사랑이라면 사랑이 더 뜨거워져야 되는 것이 아닌가?
사랑했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는데 사랑은 사라져간다.
베드로가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할 때 가식이었을까? 그 순간은 진심이었으나 세 번 부인 한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씀에서 사랑을 가장 잘 보여준 곳이 주님이 부활해서 베드로를 만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씩이나 묻는 장면이다. 베드로(나)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게하시려고 세 번씩이나 물었지만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베드로는 근심하며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주님의 사랑을 나중에야 알게된 베드로는 주님이 허리를 동이고 네가 내 발을 씻으면 나와 상관없는 자라고 말씀 하시며 자기 발을 씻어준 것이 주님만이 나를 사랑 할 수 있다는 주님의 은혜에 목이 메어 성경에 허리를 동이고라고 썼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나)를 사랑할 수있으며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수있다하면 주님을 욕되게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있다고 속지말고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누리며 감사하기만하면 된다. 주님의 사랑을 크게 누릴수록 상대의 미운 점이 작아져 상대를 정죄하는 대신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나가게된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지만 이것은 육체의 열매이고 우리를 통하여 나온 앞의 주님의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은 이 큰 주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