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저녁 예배당을 짓기 위한 작정을 하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종은 기도하시는 가운데 미리 “주일 저녁에 작정을 하게 될 것이니까, 동참하기를 원치 않
으시는 분들은 안나오셔도 됩니다.” 하시면서, 이번 한 번만으로 이번 예배당 짓는 작정을
마무리 짓고 만약에 물질이 적게 나오더라도 두번 작정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단호히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듭 당부하시기를 “작정을 안해도 좋으니까 시험은 들지 마세요. 이런
큰 일 앞에 시험들므로써 연약한 지체들을 어둡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고 한 사람이라도 부담을 뛰어넘지 못해서 넘어지기를 원치않으시는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또, 무기명으로 해서“전혀 사람을 기대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이 누가 힘에
겹도록 많이 한 것을 알게 된다면 만약 그 지체가 비뚠 길로 갈지라도 그런 부분에 담대하게
지적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그 지체를 위해서 알고 싶지 않고, 또 누가 적게 했다고 거기에도
고정관념을 가지고 싶지 않다”고 말씀 하시면서 어떻든지 지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하시는 종의 마음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일 저녁에 예상외로 많은 지체들이 참가하게 되었고 공사에 필요한 합당한 물질이
작정이 되어졌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군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계속 더하시고, 필요한 자재를
보내어 주시는 등 주님이 앞서 길을 열어가시는 것을 보게 되면서 이 일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는 사단도 강하게 역사하는 느헤미야서의 말씀대로, 산발랏과
도비야와 같은 예배당 부지 이웃 주민들이 일어나서 벌써 시청에 민원을 두 번이나 내었고,
결사 반대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을 듣게 되었지만, 종의 마음에 이미 느헤미야 성경이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을 확신하시면서 더욱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고자 하시는 말씀들을
듣게 되면서 지체들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계속해서 낮·저녁으로 집회 전단지를 돌리면서
전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다음은 주일낮 종의 말씀이 은혜가 되어서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교회에 전달하는 사람’이지, 사람으로 부터
“저 목사님은 믿음이 참 좋아” 아니면 "저 목사님은 믿음이 안좋아” 하는 말을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선교학생이 일반 교회 목사님과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유월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상대방 목사님이 “잠깐, 당신‘유월절’이 히브리어로 무슨 말인지 아느냐?”
고 물으니까, 그것을 모르는 선교학생이 가만히 있으니까, “히브리어로‘유월절’ 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전도를 하느냐?” 고 하면서 큰 소리를 치더랍니다. 그 선교학생이
교제를 하는둥 마는둥하고 교회로 돌아와서 목사님께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까, 목사님 왈 “한국사람이 히브리어를 알면, 얼마나 잘 알겠느냐?
히브리 사람보다 더 잘 하겠느냐? 히브리 사람들 구원받았느냐? 못 받았느냐?”하고 물으
시니까, 그 선교학생이 “못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히브리어를 아무리
잘해도 구원 못 받으면 지옥가!”하셨답니다.
저는 ‘저들에게 필요하고, 하나님이 저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저에게 넣어주세요’
하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 부터 28 절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이시면서‘부정한 짐승을 잡아 먹으라’고
하시자, 14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하면서 조상 대대로 먹지 않아 왔던 부정한 음식 - 신명기 14장 3절 부터 21절 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누어 놓고 부정한 짐승은 먹지 말라고 하셨음 - 을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짐승은 사람을 빗대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여우같은 여자’
내지 ‘늑대같은 남자’하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15절에서,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베드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이 베드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고, 하나님의 세계를 못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소경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세상이 아예 어두워서 그 어두운 가운데 있는 소경이 있고,
그 눈이 감겨서 못보는 소경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말씀을 보면,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5-18)
여기서 ‘어두움’은 사단의 권세 아래·죄 아래 있는 부정한 것을 뜻하고,‘빛’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죄사함을 받는 정한 것을 뜻하는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이 세상이 아예
어두워서 모든 인생들은 소경으로 죄 아래 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이 대속제물로 오신
후에는 이미 이 세상에 빛이 들어왔고 정하게 해 놓으셨기 때문에 이제 그 눈이 감겨서 소경되어
있는 인생들의 눈을 띄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도 바울의 눈을 먼저 띄워주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사도행전 10장 28절로 돌아가서 보면,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베드로는 이방인을 더럽고 추한 부정한 짐승 처럼 생각해
왔지만 - 요한복음 4장 9절을 보면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개·돼지 취급하여 상종도 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됨 - 15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서, 베드로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돼지가 어떻게 새김질을 하고, 뱀장어가 어떻게 비늘을 스스로 만들어서 정한 짐승이
될 수가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인간인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깨끗케 하시면
가능합니다.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
하나님은 깨끗케 하셨지만, 베드로의 마음(생각)에는 더럽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베드로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바꾸셔야 했습니다.
우리 편에서는 도둑질하고, 간음하는 것이 죄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우리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맞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바꾸는 일’을 성경에 많이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열왕기하 4장 38절 부터 44절 말씀 가운데, 43절을 보게 되면,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사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내가 보고, 내가 알고, 내가 경험한 것만 가지고 살아왔지,
하나님의 말씀도 내 생각에 맞추어서 맞는 것은 받아들이고, 맞지 않는 것은 버리면서 살아왔지,
한번도 내 생각이 뒤집어져서 말씀의 세계안으로 내 자신이 옮겨진 적은 없는 것을 보게됩니다.
열왕기하 5장 13절에 자기 생각을 따라서 떠나가는 나아만을 다시 그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을 버리고
말씀대로 이끌림을 받도록 인도하는 종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말씀의 인도를
받은 나아만은 문둥병이 깨끗이 낫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반면에 열왕기하 5장 20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오던 게하시는 어느날 자기 생각의 이끌림을 받게 됨으로써 문둥병이
걸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 세상 전체가 어두움에 있었고, 눈도 감겨져 있었지만,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빛은 왔지만 사람들의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에, 이제는 눈이 띄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 22절과 27절 28절 말씀을 보면,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하면서 전에 말씀을 들었으나, 지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는 음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는데 지금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의 이끌림을
받으면서 주님과 지금 동행하고 있지않다면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것도 법이 되고 기준이 될 수 없고 지금 주님이 나에게 들려주고 보여주시는 것이 없으면,
그 사람이 바로 소경이요, 귀머거리인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살 것 같고, 죽으면 죽을 것 같았던 생각 속에서만 살아온 사람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임에 오면 피곤하다’,‘교회 안에 있으면 망하겠다’는 생각은 바꿔져야 합니다. ‘망하겠다’
는 것은 ‘안 망했다’는 것을 뜻하고, ‘죽겠다’는 것은 ‘안 죽었다’는 것입니다. 진짜 망하고
죽으면 자기 생각(경험)이 틀린 것을 깨닫고 주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내 생각과 다른 세계(말씀의 세계)로 마음이 옮겨져야 합니다. 베드로 한 사람의 마음이 옮겨짐으로써
많은 심령들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말씀의 세계로 옮겨짐으로써 우리를 통해서 많은 심령들이 구원을 받게 되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