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7장 20절 ∼ 22절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제가 복음 안에 사는 동안 내 앞에 어려운 일들이 참 많이 닥쳤습니다. 물론 양식이 없거나 집 문제 때문에 어렵기도 했지만 형제 자매들의 마음이 변해서 사탄에게 속아서 교회를 떠날 때 그런 아픔들, 또 사역자들 속에 일어나는 이런 저런 일들이 내 마음을 참 아프게 했고 또 내가 실망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러한 일들을 당할 때, 내가 어떻게 할 줄을 몰라서 망설이고, 주저하고, 근심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그랬는데, 놀라운 것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그 때 참 어려웠던 그것이 지나고 보면 어려움이 아니라 축복으로, 은혜로 바뀌어지는 경우를 참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그런 일을 한 번 두 번 경험하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과연 이 어려움은 어떤 축복으로 변할 것인가? 또 하나님은 내게 무슨 복을 주기 위해서 이런 어려움을 주신 것인가?` 그런 쪽으로 내 마음이 바뀌어 지더라는 거죠.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보는 것하고 전혀 다른 세계의 눈으로 사물을 보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보실 때, 간음한 여자를 보실 때마다 우리가 보는 눈하고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 바울이나, 이런 종들도 예수님과 가까이 하며 눈이 달라졌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말하자면 오늘 저녁에 읽은 이 말씀처럼 그들이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가지고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이제 그 배 안에 탄 사람 어느 누구도 "우린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우린 다 죽었다." 그런 위치에 들어있는데, 문제는 사도 바울도 그렇게 생각했느냐는 거죠. 사도바울도 빌립보 감옥 속에서 매를 맞고, 정말 지쳐 쓰러져 있다가 일어났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걸 절망이라고 말하고, 고통이라고 말하고, 불평했지만 바울은 그렇게 했느냐? 그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면 내가 당하는 이 어려움을 나는 어려움이다, 고통이라고 말하겠지만 주님은 이 일을 어려움이다, 고통이라고 하지 않을 거라는 거지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아들이 하나도 없는데도 아브라함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에게 생산을 허락지 않으셨으니..." 그렇게 말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많은 무리의 아비, 아브라함"이라고 말하셨다는 거죠.
그러면 우리가 지금 당하는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나 절망을 가지고 우리는 고난이라고 말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절망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이 문제를 예수님도 절망이라고 말씀하시겠느냐? 예수님도 아픔이라고 말씀하시겠느냐? 예수님도 고난이라고 말씀하시겠느냐? 여기에서 우리가 사탄의 음성을 들으면 `이건 실망이야. 고통이야. 나는 망했어. 예수 믿어 잘 된 게 하나도 없어.` 그런 쪽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전혀 다르다는 거죠.
제가 이런 이야기 자주 하지만 저희 교회에 어떤 부인 자매가 있었습니다. 지난 겨울 수양회 때 구원을 받았어요. 구원을 받고 우리 교회에 처음 참석해서 그 부인은 참 은혜로운 간증을 했습니다. 기억력이 안 좋아서 그 간증을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예배를 마치고 그 부인이 나에게 찾아와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목사님 제가 구원을 받고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수양회를 마치고 집에 오려고 하니까 제 딸아이가 눈이 굉장히 안 좋은데, 수십만 원 들여서 맞춘 특수 안경을 잊어버렸습니다." 구원받고 기뻤다가 그걸 보는 순간 짜증이 나고 마음에 걱정이 되고 그랬다는 거죠.
그런데 순간 이 자매가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금방 그 마음을 가졌다가 전에 갖지 못했던 새 마음이 하나 들어왔는데, `이 안경을 하나님이 잊게 하지 않으면 잊지 않을 수 있는데, 하나님은 안경 잊어버리는 것 아셨을 텐데, 하나님이 안경을 잊도록 내버려두셨다. 하나님이 왜 안경을 잊어버리도록 내버려 두셨겠느냐?` 이건 분명히 우리 딸이 안경을 안 껴도 눈이 좋아질 거란 마음이 들었다는 거예요. 그 자매는 날보고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그럼 제 딸이 안경을 안 껴도 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갓 구원받은 그 자매 믿음에 따라서 기도를 했어요. 한 열흘쯤 지났는데, 그 자매가 나한테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어떻게 해야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남편이 날보고 미쳤다고 막 소리를 치면서, 당장 안경 맞춰 오라고, 안경 안 맞추면 눈 수술해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고 막 그러는데, 목사님 내 마음에는 믿음이 있거든요. 그런데 남편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걸 알고 싶은데, 목사님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안경을 맞출까요, 말까요?"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자매를 보고 말했어요. "자매 오늘 저녁 9시 반에 우리 집에 와 보라고" 왜? 그때 우리 집에는 김성훈 목사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 동생이 안과 전문의예요. 거창에 있다가 청주병원으로 옮겨오면서 그때 아파트가 아직 안 되어서 우리 집에 며칠 머물렀어요. 그게 생각이 나서 그 형제가 9시 반에 퇴근을 하기 때문에, 오늘 저녁 9시 반에 오면 한번 보이겠다고.
9시 반에 딸을 데리고 왔어요. 내가 형제를 불러서 `김 형제, 얘 눈 좀 봐 달라`고 했어요. 한쪽 눈을 가리고 한참 뭘 하더니 30분쯤 지났는데, "이 아이는 그 안경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 아이 눈은 거의 정상입니다. 약간 나쁘긴 하지만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그 엄마가 감격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는 모양을 보았습니다.
안경을 잊어버려서 짜증이 나고, `비싼 안경인데 누가 훔쳐갔겠노? 쓸모도 없는 걸. 이 수양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노?` 그렇게 불평할 수 있다는 거죠. 자매 마음에 불평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금방 그 마음 속에 어떤 마음이 들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걸 잊게 하셨다면 이제 안경을 안 써도 되겠다`는 그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오면서 그 자매 구원받고 바로 자기 딸이 눈이 낫는 그런 것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가르치기를 원하느냐 하면, 말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를 원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남미에 가면 "부에노디아스"하고 인사를 하지요. 또 "굿 이브닝" "굿 나잇" 이라고 인사를 하지요. 다 말이 다른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쓰는 그 말 말고 예수님이 쓰는 말로 우리 말을 바꾸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거지요. 우리는 분명히 이런 문제를 불평이라고 말하고, 절망이라고 말하고, 고통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거지요. 이것을 소망이라고, 기쁨이라고, 주님이 일할 조건이라고 그렇게 말하라는 거죠. 주님이 우리에게 그 말을 가르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그 말을 배웠어요. 분명히 배가 파선 직전에 있고 구원의 여망이 없는데, 사람들이 이제 우린 다 죽었다고 말하는데, 사도 바울은 다른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 중에 한 사람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치 않겠다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다른 방언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쓰는 말 말고 예수님이 쓰는 다른 말을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영어도 중국어도 에스파뇰도 한국말도 아닌 예수님의 말씀.
여러분 절망이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아니야. 그건 소망이야."
여러분이 어려움이라고 말할 때,
"아니야. 이건 축복의 전주곡이야."
이건 고통이라고 말할 때,
"아니야 이건 기쁨이야."
그렇게 우리에게 주님이 새로운 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직까지 사탄에게 말을 배워서 절망이라고, 슬픔이라고, 고통이라고 말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주님이 이 어려움을 어떻게 기쁨으로 바꾸실 것을 소망하고 기대하면서 "이건 기쁨이야. 이건 과정일 따름이야. 이건 곧 기쁨이 될 거야. 이건 기쁨이야 소망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으로 여러분이 쓰는 말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분 그 말을 배웠습니까. 주님의 말씀, 주님을 따라서 우리가 하는 말 말고 주님의 말을 배워봅시다. 그래서 지금까지 쓰던 짜증, 불평, 원망, 실망하지 말고 소망가운데 주님을 기다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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