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3장 1절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저는 이 룻기 서를 읽으면서 룻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에 가서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죽고, 과부만 셋이 남았는데, 룻이라고 하는 그 과부 며느리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러면서 그때부터 하나님이 나오미 속에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이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보리 추수 때가 되어서 이삭을 주우러 나가는데, 성경에 보면 룻만 이삭을 주우러 나가더라구요. 사실 그들은 양식을 모아둔 것도 없고 보리 추수하는 그 짧은 기간동안 이삭을 주워야 하기 때문에 그때 이삭을 주워가지고 일년을 먹고살자면 나오미도 같이 이삭을 주우러 나가야 했을 텐데, 나오미가 왜 이삭을 주우러 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는지, 그 이유는 성경 룻기를 아무리 읽어봐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룻만 이삭을 주우러 보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가운데 한가지는 나오미가 집에서 그냥 놀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룻을 이삭을 주우러 보낸 뒤에 나오미는 집에서 아마 룻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것이 낯선 외국 땅에 와서 이삭을 주우러 가긴 하지만 이삭을 줍다가 농부들에게 쫓김을 당하고, 배가 고프고, 실망되어서 돌아오지는 않을까? 아니면 이삭을 주운 게 적어가지고 부끄러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진 않을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오미는 룻과 함께 이삭을 주우러 나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마음이 내 마음에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룻이 돌아왔을 때, 2장 17절에 보면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 19절에 나오미가 말하기를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러니까 이 성경을 읽어보면 분명히 나오미가 룻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는 거지요. 기도를 했는데, 내 기도의 응답으로 룻이 나가서 정말 이삭을 잘 주워오겠다는 그 믿음이 드니까 룻이 들어오자 당장 "너 오늘 어느 밭에서 일했느냐? 네게 은혜를 베푼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한다"고. 그러면서 룻이 "내가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하고 말을 하니까 나오미의 마음에 `맞아.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보아스에게 연결해 주셨겠구나.`
그러면서 3장 1절에서 어느 날 나오미가 룻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서 너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저가 오늘 보리를 까부는데 너는 가서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있다가 그 발치 이불을 들고 들어가 누워라."
그 방식은 너무너무 유치한 방식 같은지 모르겠지만 나오미는 자기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겠다는, 마음에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했고, 우리가 보기엔 유치한 방법처럼 보이고 룻도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결국 그 일이 성공적으로 아름답게 되어졌다는 거지요.
그러면 나오미에게서 이런 믿음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 그 부분을 오늘 저녁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거든요. 나오미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성읍 사람들이 나오미를 보고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1장 19절에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이 나오미라는 말은 "희락", "기쁨"이라는 말인데,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이 나오미의 마음에 `하나님이 자기를 치셨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아픔을 주셨다.` 정말 자기 마음에 말할 수 없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고, 과부 된 며느리를 데리고 그 마음에 많은 아픔을 겪고 어떤 한계에 도달했다는 거지요.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기 위하여 정말 우리의 인간의 방법으로 할 수 있는 어떤 형편에다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게 아니라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런 한계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계신다는 거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이 보내시는 그 한계 속에 빠져서 `이야 나는 끝이구나. 나에게 기쁨이 없구나. 나에겐 만족이 없구나. 방법이 없구나.` 그러면서 자기를 기대하는 것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역사에 그 마음이 함께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돌아올 때, 나오미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성읍 사람들이 나오면서 "아이구 이게 나오미가 아니냐?" 나오미가 하는 말이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라. 나를 기쁨이라고 부르지 말라. 나를 희락이라고 부르지 말라. 나를 마라라고 해라. 고통이라고 불러라. 나를 괴로움이라고 불러라."
왜?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 나오미의 속 중심에서부터 자기를 괴롭게 하신 전능자를 알고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면서 그 마음에 심한 통곡이 있었고, 좌절이 있었고, 그러면서 자기를 기대하고 자기의 좋은 모든 게 다 무너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우리가 잘 못하고 있지만 마귀는 "다시 해봐. 하면 될 거야. 정말 더 열심히 기도하면 될 거야. 너 이번에는 정말 각오하고 금식기도하면서 신앙생활 해봐. 성경 좀 제대로 읽어봐. 주일 잘 지키고 술 끊어봐. 하나님이 역사할 거야." 사단은 우리를 그런 쪽으로 이끕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단에게 속아서 내가 잘못했지만 이번에 내가 하나님께 잘 하면, 이번에 내가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면, 이번에 내가 마음을 쏟으면, 하나님 내게 역사할 거라는 그런 어리석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로 몰아가시느냐 하면, 나오미가 말하는 그 시점으로, "나를 나오미라 하지 말라. 나를 기쁨이라, 즐거움이라 말하지 말라. 나를 마라라고 말해라. 나를 괴로움이라고 말해라.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 철두철미하게 자기의 망한 사실을 인정하고 자기를 부인한 그 위치에 나오미가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제 이상 더 나오미는 자기가 아무 것도 할 만한 힘이 없고 아무 것도 할 만한 기대를 걸 것이 없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며느리를 이삭을 주우러 보냈는데, 다른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서 보리추수를 한다고 막 기뻐하는데, 그 보리 추수할 만한 땅이 하나도 없고, 앞으로 일 년 동안 살아야 하는데, 이삭이라도 주워야 하는데, 베들레헴 사람들이 모압 여자에게 이삭을 줍도록 허락할는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아무 소망이 없는 거예요. 이삭 줍는데도 나오미는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어야 했어요. "하나님 우리 며느리 이삭을 줍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그가 정말 남들에게 내쫓김을 당치 않게 해 주십시오." 그랬는데 하루종일 며느리를 위해 기도하다 보니까 마음에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는 거예요.
"내가 네 며느리를 지키겠다." 그 마음, 하나님에게 받은 소망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니까 며느리가 돌아오니까 "너 오늘 어디서 일했느냐? 너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복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한 그 응답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니까 며느리를 통해 들어보고 싶은 거지요. 며느리가 "내가 오늘 보아스의 밭에 들어갔습니다." 먹다 남은 곡식을 줄 때, `이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기업을 무를 근족에게로 며느리를 보내셨구나. 은혜를 입게 하셨구나.`
그 마음에 믿음을 가지면서 3장 1절에서는 "내 딸아 내가 너로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이 이야기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나오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구하는 도중에 하나님이 보아스와 연결시켜서 가정을 주겠다는 그 마음에 믿음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비록 유치한 방법으로 타작마당에 내려가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신다는 거죠.
나오미에게는 그런 믿음이 오기 전에 한번 가기 자신이 무너지고, 자기 자신의 소망이 고통 속에 빠지는, "나를 나오미라고 하지 마라. 차라리 나를 마라라고 해라. 왜 나를 보고 희락이라고 말하느냐? 왜 나를 기쁨이라고 말하느냐? 나를 기쁨이라고 부르지 말라. 나를 괴로움이라고 불러라.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고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철두철미하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거기서 나오미가 부서져 내리면서 그 마음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면서 믿음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이 나오미처럼 철두철미하게 내 자신이 실패하고 무너진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내가 뭘 하면 될 것 같은 그런 어리석은 생각 속에 속아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있게 일을 하실 수 없다는 거지요.
정말 여러분 그 나오미가 며느리를 데리고 막막한 가운데서 믿음으로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얻고 아들을 낳고 풍성하게 살 수 있는 그것이 나오미가 먼저 자기를 다 포기할 만한 고통을 겪고 그 뒤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일어나서 이렇게 바꾸었다는 거지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들도 한번 나오미처럼 `하나님이 나를 치셨구나. 나를 기뻐하지 않는구나. 내 육을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으시는구나.` 철두철미하게 나오미처럼 내 자신을 깨닫고 내 자신이 무너져 버리면 그때 나오미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역사하는 믿음이 일어나고 하나님 뜻을 이루게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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