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대가 지식 지혜 경험이 쌓이고 머리도 잘 돌아가 판단도 잘 내리고 신분도 정해지고 신체적인 면도 완숙하여 절정기라고 생각한다.
모세가 사십대일 때 세상적으로 부귀영화를 다누리며 애굽의 총리가 되어 더 바랄 수 없는 자리에 있었지만 애굽병사에게 자기백성이 매맞는 것을 보고 애굽병사를 죽였다. 길거리의 거지를 봐도 피해 가는게 우리의 속성인데 자기의 신분 부귀영화를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할 짓을 할 수 있을까? 모세는 자기가 자기 백성을 구힐 자라는 신념을 가지고 했다. 모세를 밀고한 자는 애굽사람이 아니라 자기백성이었다. 모세는 할 수없이 광야로 도망갔다.
자기 백성을 구하려는 모세를 하나님은 지켜주셔야지 하나님은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
여기서 하나님은 자격과 능력을 다 갖추었을 때 즉 내 힘으로 할 때는 쓰시지 않는 것을 본다.
공야로 도망간 모세는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되어 이방인 여자나 마누라로 얻고 아들이 생기니 타국에서 객이 되었구나하고 짓고 자포자기한 삶을 산다. 악한 부모라도 자기자식을 절망적인 이름으로 짓지는 않을 것이다.
모세의 광야생활기간을 연단의 기간이라 한다.
연단이라면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하여 뼈를 깍는 자기훈련이라 생각하나 모세가 받은 연단은 그런게 아니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심오한 사상을 연구하고 철학을 공부하고 정신수양을 하며 무술을 연마하여 자기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때를 기다리는 하나님이 부르시기만 기다리는 연단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백성을 인도하라하니 내가 누구관대 인도합니까가 모세의 대답이었다.
하나님의 연단이란 이렇게 철저하게 나를 죽이는 것이다. 내가 죽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이해한다하면 자기 철학이 되고 만다.
성경말씀은 성령이 깨닫게 해주시며 내생각은 죽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