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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은혜가운데 치루어진 3차 수양회
1999-01-18
4000명정도의 형제 자매님들이 모인 가운데
제 28회 겨울 수양회 3차가 1999년 1월 11일(월)~16일(토)동안 치루어졌다.

강사인 박옥수 목사님는 매 시간마다
요셉의 생애에 대해서 시리즈로 말씀을 전하셨다.
저녁 시간마다 전파된 말씀을 간추려 요약해 보았다.

첫째 날(창세기 40장 1절~23절)

요셉을 만난 사람들은 항상 두 부류로 나뉘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처음에는 같은 죄를 짓고
같은 꿈을 꾼 사람처럼 보였지만, 요셉을 만나면서 그들은
축복과 저주로 나누어졌다. 그렇듯이,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사람들은 믿음을 가져서 축복을 받거나,
아니면 거스리고 대적하여 저주를 받는 자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가리키는 것이다.
술 맡은 관원장은 오직 포도주만으로 왕 앞에 나아갔고,
떡 굽는 관원장은 떡 세 광주리와 그 위에 구운 식물을 더하여 갔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축복을 얻고 떡 굽는 관원장을 저주를 받았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만을 의지하여야 하는데,
예수님 외에 다른 무언가를 보태면 저주를 받는 것이다.


둘째 날(창세기 41장 1절~16절)

술 맡은 관원장이 전직을 되 찾은 후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사단은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거하실 기회를 빼앗아 가려고 한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못했던 동안
요셉은 감옥에 갖혀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사단이 우리에게 생각을 넣어주면
갖가지 더럽고 거짓된 생각이 나오게 되어있다.
반대로, 주님은 죄와 같이 거할 수 없으시기에
예수님이 우리안에 오시면 탐욕이 물러가고 세상 정욕도 물러가는 것이다.
죄에서 놓임을 받기 위해 각오와 결심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죄의 멍에와 의문을 풀어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으신 것이다.


셋째 날(창세기 41장 37절~52절)

바로는 요셉의 해석의 길함을 보고 요셉을 나라의 총리로 세웠다.
바로가 요셉을 나라의 총리로 세운 이후로
애굽에 오는 모든 문제를 바로는 요셉의 손에 맡겼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그렇다.
우리의 삶에 수없이 많은 문제가 일어나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계시면
총리되신 예수님이 능력으로 처리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는 죄의 문제든지 어떤 문제든지 이길 힘이 있는 것이다.


넷째 날(창세기 42장 1절~17절)

온 땅에 기근이 들어서 모든 사람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애굽에 있는 요셉 앞으로 나아 왔다.
그렇듯이,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도록 하셨다.
예수님 앞에만 참 죄 사함과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

요셉을 팔아버렸던 형들이지만
결국 그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단은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는다.
만약 요셉이 처음부터 자신이 요셉이라고 형들에게 말했다면,
형들은 요셉을 알아볼 수는 있었겠지만
요셉의 마음을 모르기에 요셉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의 소리다.
하나님의 마음이 성경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나면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흐르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은혜를 입고자 할 것이다.


다섯째 날(창세기 42장 26절~38절)

야곱은 라헬이 죽으며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를 베냐민으로 바꾸었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이란 뜻이고,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이다.
라헬은 아들을 낳고도 안아 볼 수 없기에,
그리고 아들은 어머니의 품에 한번도 안길 수가 없기에
라헬은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한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베노니를 베냐민으로 바꾸었다.
요셉은 형들과 만날 때에 베냐민을 필요로 했듯이,
하나님과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야곱은 믿음으로 베노니를 베냐민으로 바꾸었다.
거듭난 이후에는 우리의 운명이 달라진다.
거듭난 자에게 있어서 분명히 이 일은 불가능하며 끝났다 싶은데
주님이 축복으로 바꾸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그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 형편에서 능히 벗어나게 하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피나, 꽃과 열매의 모습은 다르다.
하지만 믿음있는 자들은 꽃을 보며 열매를 바라보는 것이다.
슬픔이 피나 기쁨이 맺히는 것이다.
슬퍼하는 일이 있다면,
주님은 후일에 기쁨으로 바꾸신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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